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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 특집 -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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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1 09:38:59
특집/ 참된행복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김지석·야고보 주교

병술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새해를 맞이할 때면 서로간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인사를 나눕니다. 과연 복이 무엇이며 누구로부터 받는 것이기에 왜 모든 사람들은 이렇듯 자신을 포함하여 친지들이 복을 많이 받아 행복해지기를 기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어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도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을 주시며 그들을 여러 지방에 파견하시어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10,12~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와 준비를 갖춘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가르침에 마음을 여는 사람들은 제자들을 통해 베푸시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겠지만 마음의 문을 닫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축복에서 제외됩니다.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이것을 얻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또 나름대로 행복의 경험을 하고는 있지만 한마디로 ‘이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행복감이란 자신이 희망하고 원하던 일이 성취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만족감은 개인의 취향과 환경, 종류 등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비록 의식은 못하지만 엄마 품에 포근히 안긴 아기는 행복합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 친구들과 어울려 산이나 들, 바다로 여행하는 것,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하는 시간들, 사업에 성공하여 큰 재산을 얻었을 때, 원하던 명예를 얻었을 때 사람들은 크고 작은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선뜻 이런저런 때였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철들기 전까지도 비록 기억은 없지만 매우 행복했었고, 철이 들고 나서 오늘 이 순간까지도 행복한 시간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굳이 하나를 말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항상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피난 시절일 것입니다.
한국전쟁 중 피난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의 보살핌을 경험한 행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6·25전쟁 때 미처 피난을 멀리 가지 못하여서 도중에 아버님이 공산군에게 잡혀 온갖 고초를 겪으며 감옥을 드나드셨습니다. 얼마 후 공산군이 패주하면서 아버님과 함께 감옥에 갇혀있던 모든 사람들을 학살하였는데, 아버님만이 유일하게 학살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며칠 후 죽이려고 하는 사람에게 명절이라고 잠시나마 외출을 허락한다는 것은 인간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기에, 아버님은 하느님과 성모님의 특별한 보살핌이었다고 항상 굳게 믿으셨습니다. 이렇게 구사일생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나서 몇 달 후 1·4후퇴 때는 엄동설한임에도 불구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숨에 논산까지 피난을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논산에서의 피난생활은 물론 고달픈 삶이었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행복한 한 토막의 추억을 만들어주었습니다. 하기야 열한 살의 철부지로 작은 피난 봇짐을 등에 메고 부모님과 함께 여행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섰으니 말입니다.
아버님은 논산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볏짚장사를 하셨습니다. 시골에서 볏짚을 사다가 시장에서 땔감으로 소매를 하는 것이었는데 물론 나도 아버님을 따라다니며 도와드렸지요. 이곳저곳 시골 농가를 찾아다니며 볏짚을 사서 지게에 지고 오시는데 나도 한 단 등에 짊어지고 아버님과 길을 걸으며 말동무가 되던 그때의 행복하고 즐거웠던 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이렇게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님은 저녁을 준비하시고는 동생들과 함께 어김없이 길목에 마중을 나와 계셨습니다. 가족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시간은 참으로 축복의 시간이었고 행복했습니다. 비록 꽁보리밥에 반찬이라야 클로버나 쇠비름을 삶아 소금에 무친 것이 전부였고, 때로 어머님이 이웃의 일을 돕고 얻은 된장이 첨가되면 더욱 입맛을 돋우는 별미가 되었습니다.
고통스럽고 가난한 피난 시절의 추억이 왜 그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으로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비록 외적으로는 고달프고 가난한 삶이었지만 내가 전적으로 의지하고 나의 생활을 책임져주는 든든한 보루로서 부모님이 계셨기에 마음은 평화스럽고 풍요로울 수 있었습니다. 즉 부모님의 사랑으로 이뤄진 가정이란 울타리가 나를 지켜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부모님과 함께한 시간에 행복하였듯이 우리의 아버지시며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이 바로 참된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섬기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하느님 안에 머물게 됩니다(1요한 3,24). 하느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며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기 위해 오셨듯이 우리가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봉사와 희생의 삶을 통해 남을 섬기고 모든 일에 감사할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화와 참된 행복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강론을 통해 군중들에게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행복한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세상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오히려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3~12 참조). 그 까닭은 세상이 생각하는 행복과 하느님의 자녀들이 갈망하는 행복은 분명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출세하여 권력을 손에 넣고 많은 재산을 갖게 되면 행복이 뒤따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질 만능주의와 극단적 이기주의가 만연돼있는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이웃은 마치 나의 희망과 행복을 빼앗아가려는 방해자이며 밟고 올라서야 할 경쟁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기에 이웃이 없다면 나의 행복도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되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우리 삶이 보다 편리해진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인간의 행복이 되지는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잠시 지나가는 현세의 부귀영화가 인생의 궁극 목적인 듯 근시안적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가운데 자기 희생과 봉사를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도둑이나 좀이 가까이하지 못하는 곳에 없어지지 않는 작은 보물들을 쌓아가며(마태 6,20 참조) 내세의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 세상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카 12,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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