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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월 특집 - 성경에서 본 생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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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1 09:55:55
특집/생명

성경에서 본 생명에 대하여

김정남·바르나바 신부

1. 구약성경

생명과 관계되는 히브리 말은 루아흐, 너샤마, 네페쉬, 하이임, 그리고 담이다. 이 가운데 본래 ‘바람, 숨, 영’을 의미하는 생명(루아흐)과 생명력의 원천으로 이해되는 피(담)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생명은 숨과 피 안에 들어있는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야훼계 창조설화에서 잘 드러난다.
“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 땅에는 아직 들의 덤불이 하나도 없고, 아직 들풀 한 포기도 돋아나지 않았다. 주 하느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흙을 일굴 사람도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땅에서 안개가 솟아올라 땅거죽을 모두 적셨다.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5~7).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다. 이것들이 너희의 손에 주어졌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풀을 주었듯이,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 다만 생명 곧 피가 들어있는 살코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나는 너희 각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남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 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자도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하리라.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창세 9,1~6).
하느님이 모든 생명의 원천임을 알려주는 내용은 창세기뿐 아니라 구약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제 너희는 보아라! 나, 바로 내가 그다. 나 말고는 하느님이 없다.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나는 치기도 하고 고쳐주기도 한다”(신명 32,39).
사무엘 상권에서도 이와 비슷한 한나의 고백이 나온다. “주님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 저승에 내리기도 올리기도 하신다”(1사무 2,6).
시편의 저자도 하느님이 인간 생명의 원천임을 노래한다.
“하느님, 당신의 자애가 얼마나 존귀합니까! 신들과 사람들이 당신 날개 그늘에 피신합니다. 그들은 당신 집의 기름기로 흠뻑 취하고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당신 기쁨의 강물을 마시게 하십니다.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시편 36,8~10).
예언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밝혀준다. “그날에 사람들은 자기를 지으신 분을 바라보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로 눈을 들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 손으로 만든 작품인 제단들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들 손가락으로 만든 아세라 목상들과 분향 제단들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이사 17,7~8).
지혜 문학에서도 이러한 생명관이 드러난다. “당신께서 저를 진흙처럼 빚어 만드셨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이제 저를 먼지로 되돌리려 하십니다. 당신께서 저를 우유처럼 부으시어 치즈처럼 굳히지 않으셨습니까? 살갗과 살로 저를 입히시고 뼈와 힘줄로 저를 엮으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생명과 자애를 베푸시고 저를 보살피시어 제 목숨을 지켜주셨습니다”(욥 10,9~12).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성경에서 모든 생명은 모두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선물인 인간 생명은 주로 현세적으로 이해되었기에 오래 사는 것(장수)은 하느님이 베푸시는 축복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육체적 죽음을 인간 생명의 끝이라고 보았다. 사후 생명에 관한 진술은 구약성경 후기 문헌에서 발견된다(다니 12,2 : 마카 7,9 ; 14,46 참조).

2. 신약성경

신약성경에서 생명과 관계되는 그리스어는 조애와 프쉬케다. 조애는 주로 사후의 영원한 생명을 가리킬 때 쓰고 프쉬케는 흔히 현세의 생명을 나타낼 때 사용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다만 사도 요한이 조애를 즐겨 사용했고, 공관복음서 즉 마르코,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에서는 조애가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나아가 공관복음서에서 프쉬케는 대부분의 경우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닌 영원한 생명을 뜻하며, 흔히 같은 의미로 하느님 나라 또는 하늘나라가 사용된다.

1) 공관복음서의 생명관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예수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청하자 다른 열 제자가 이들을 불쾌하게 생각하였다(마르 10,35~41).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2~45).
예수님은 생명을 존중하신다. 그는 최선을 다하여 인간의 생명을 구하시며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따뜻이 배려하신다. 예수님은 현세 생명을 위해 투신하면서도 결코 현세 생명에 집착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목표를 두고 살아가도록 촉구하신다.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부자 젊은이에게 이르신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16~21).

2) 사도 요한의 생명관
“자기 목숨(프쉬케)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조애)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요한 사도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처럼 인용한 바, 현세적 생명인 ‘프쉬케’와 신적인 영원한 생명인 ‘조애’를 뚜렷이 구별한다. 요한 복음서의 머리글에서 예수님은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신 분으로 나타난다(요한 1,1~2).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예수님)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요한 3,16).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한 17,3). 더 나아가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빵이며 생명의 빛이시고 생명 자체이시다(요한 6,33 ; 8,12 ; 14,6).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심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조애)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3)사도 바오로의 생명관
사도 바오로도 사도 요한처럼 프쉬케와 조애를 구별해서 사용하지만, 인류 구원 사건에서는 의로움(의화:디카이오쉬네)과 속량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사도 바오로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된다고 역설한다(로마 3,21~26 참조). 더 나아가 사도 바오로는 성령을 통한 생명과 새로운 삶을 강조한다(로마 8,10~11 : 1코린 15,45 : 2코린 4,10. 12 : 갈라 5,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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