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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레지오 마리애 /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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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특집 - 예루살렘에서의 성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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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1 10:05:39
드디어 이스라엘에 - 윤종식 디모테오 신부

3월 18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5시에 당가 신부님께서 공항까지 차로 배웅을 해주셔서 7시 출발 비행기를 쉽게 탈 수 있었다. 밀라노를 거쳐서 텔아비브(이스라엘)에 갔다. 오후 3시 반경에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검문을 했다. 여권을 달라고 해서 주니까 ‘왜 이곳에 왔냐?’부터 체류기간은 얼마인지, 어디에서 머무는지 등등을 영어로 묻더니 통과시켜 주었다. 입국심사 때도 약 20분을 소요해서 겨우 통과를 했는데, 그 다음에 또 검문을 하여 약 15분을 심문당했다. 그 다음에야 짐을 찾아서 나올 수가 있었다.
독일에서 후원하는 슈미트 컬리지(팔레스티나인들을 위한 여학교) 교장이신 보스코 수녀님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쉰이 넘었지만 젊은이보다 열정이 넘치는 조금 마른 체격의 한국수녀님께서 직접 폭스바겐의 골프(golf)를 몰고 예루살렘의 숙소까지 데려다 주셨다. 예루살렘의 옛 성터에서 다마스커스 게이트 바로 앞에 위치한 이 숙소는 성지순례를 하는 데 아주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장사하는 소리며, 총을 소지한 이스라엘 군인들의 지나가는 모습이 잘 보이는 곳이었다.

저녁 8시에 수녀님들이 하시는 성시간에 함께 참석해서 예루살렘에서의 첫 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곳에 오게 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곳 Pauls Haus(파울루스 하우스-독일 사람을 위한 순례자의 집)는 독일수녀님이 원장, 오스트리아 폴린 수녀님이 문지기시고, 슬로바키아의 두 수녀님이 주방과 식당 홀 담당을 하시고, 우리 한국의 두 수녀님이 팔레스타인 여학교 담당이셨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약 450명의 학생들이 있다고 했다. 수녀님들은 이 어린 학생들의 미래가 참으로 안타깝다고 걱정하셨다. 나라도 없는 데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워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염려가 크셨다.

갈바리아 산에서의 미사로 시작된 순례
3월 19일 새벽 5시가 조금 넘어서 전화벨이 울렸다. 6시에 갈바리아 산에 미사를 예약했다고 해서 막 일어난 상태였다. 새벽 3시에 텔아비브 공항에 가서 3시 30분에 도착한 나의 동기 신부들을 마중 나갔다 함께 오시어 전화를 하신 것이다.
“신부님, 동기 신부님들이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곧 올라갑니다.”
그리고 1분쯤 있다가 둔탁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열어보니, 두 동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서로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인사를 하고, 다마스커스 게이트와 팔레스타인의 시장통을 지나서 ‘주님의 무덤 성당’에 갔다. 동기 셋이서 주님께서 돌아가신 갈바리아(골고타) 산에서 미사를 드리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주례를 정했는데 정 신부가 하게 되었다. 30분 이내에 끝내야 한다는 제의방지기 수사님의 이태리말을 뒤로하고 미사를 드렸다. 모든 사제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아는 모든 분들을 위해서….
잠시 묵상한 후 우리를 위해 아침을 준비해주신 수녀님들께로 가서 아침식사를 하며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전에 올리브 동산의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는데, 길목에서 팔레스티나 남자들과 아이들이 돈을 달라고 했다. 총무를 맡은 나는 이럴 때 아주 단호했다. 실제로 돈을 별로 가지고 가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지나가는 양떼가 재미있어서 캠코더로 찍으니까 찍은 값을 치르라고 꼬마 녀석이 와서 손을 벌린다. “Give me money! you photo, give me money!” 우리가 아무리 “현재는 돈이 없고 호텔이 있으니 호텔로 받으러 오라”고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같은 말 반복뿐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줄 수 있을 때는 주어도 좋은데, 빼앗으려고 달려들면 기쁜 마음으로 줄 수가 없다. 얼마 올라가다가 또 양떼를 만났는데, 서로가 눈짓을 해서 사진기에 손도 대지 않았다.
이렇게 올라가서 처음 찾아간 곳은 ‘예수님 승천 경당’이었다. 작은 돔 형태의 경당으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디디던 발 모양이 돌에 새겨져 있었다. 내려오면서 ‘주님의 기도 성당’에서 잠시 묵상을 하고 주님의 기도를 바쳤다. 그곳에 우리나라 말로 된 ‘주님의 기도’가 있어서 마음이 뿌듯했다. 조금 더 내려오니 ‘주님의 눈물 성당’이 있었는데, 예루살렘 도성이 한눈에 보이는 곳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곳이라 한다. 성당도 눈물형태로 만들었다. 혹시, 지금은 서울이나 뉴욕, 도쿄 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지는 않으실까?
키드론 계곡에 거의 다 와서 겟세마니 대성당에 들렀다. 예수님께서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시던 곳이다. 중앙제대 앞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돌반석이 있어서 그곳에 손을 대고 잠시 기도를 했다.
‘참된 사제가 되어 당신이 하셨던 그 일을 하도록 하게 하소서.’

오랜만에 많이 걸어서인지 발이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성당들이 문을 닫기 전에 가야 해서 안나 성당에 가보니 문이 닫혀 있었다. 문을 두드리니 12시 30분이 되어 문을 닫았다고 해서, 우린 신부들이니 단 10분만 보고 가겠다고 하소연을 하여 들어갔다. 입장도 무료였다. 역시 이럴 때 신부라는 신분이 큰 도움이 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모님이 태어나신 곳에 안나 성당이 있었고 그 옆 15미터쯤 아래에 벳자타 연못이 있었다. 이 연못은 빗물을 받아 두었다가 신전에서 제사드릴 때, 희생제물(양)을 씻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는 우리 모두 넉다운이 되었다. 오후 5시에 하는 한인신자들의 ‘팔마주일 미사’에 참석하려고 겨우 일어났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이곳저곳을 뛰어다닌 결과였다. 먼 타지, 그것도 늘 긴장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에서 외교관으로, 기업체에서 현지 파견근무로, 유학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5명 남짓한 신자들과 우리 셋, 그리고 두 수녀님, 안 베다 신부님, 성서공부 코스인 Ecce Homo를 하시는 세 수녀님과 함께 미사를 드렸다. 이때는 내가 당첨되어 주례를 하게 되었다.
팔마가지와 올리브가지를 들고 간단한 행렬을 하고서, 성당에 들어와서 미사를 드렸다. 미사 후에 저녁 식사를 했는데, 이런저런 현지 상황들을 조금은 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주 화자(話者)는 27년 동안 예루살렘에 계시는 안 베다 신부님이셨다. 우리를 손자처럼 예뻐해주셔서 너무나 기뻤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전례력에 따른 성 목요일 전례
오늘은 성 목요일, 예루살렘에서의 본격적인 파스카 삼일의 시작이다. 아침 6시 30분에 주님의 무덤 성당으로 갔다. 아직 성당문은 닫혀있는데, 많은 신자들이 밖에서 총대주교님의 행렬이 와서 문을 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5분 정도가 지나자, 멀리서 ‘쿵 쿵’하며 길 안내하는 터어키식 정장을 입은 안내자들의 지팡이 소리가 들려오고 행렬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총대주교님 일행이 들어가고, 그 뒤를 신자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물론 우리도 그틈에 끼었다. 제의방에 가서 제의로 갈아입고, 제의 안에 디지털 캠코더를 숨겼다. 윤 신부는 그 큰 카메라를 숨기느라 고생이다.
성 목요일 전례의 모든 것을 이 아침 전례 때 다 하는 것이 특이했다. ‘성유축성’과 ‘주의 만찬’미사의 예식들을 한꺼번에 다 한다는 것과 무덤 성당 주변을 세 번 돌며 촛불 행렬하는 것이 특이했다. 한 번에 이 모든 예식을 다 하는 이유가 아무래도 아침에만 이 성당을 사용할 수 있다는 조건과 트리엔트 공의회식이라는 두 가지 원인 때문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확인을 해야 할 일이었다.
공동집전 사제들로 가장 앞자리에 앉은 나와 윤 요한 신부는 미사 중간 중간에 캠코더와 카메라로 찍다가 두 번에 걸쳐 경고를 당했다. 공동집전 사제가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래도 중요한 장면인 성유축성과 ‘발씻김 예식’을 찍었다.

우리의 보스코 수녀님은 정 멜라니오 신부와 나를 데리고, 현재의 예루살렘 성을 통과하여 우리 숙소의 반대편에 있는 다윗성터와 히즈키아 터널을 향해 갔다. 다윗성은 현재의 성에서 볼 때는 밖에 있다. 지금도 다윗성터를 발굴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다윗은 12지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 지역을 자신의 중심지로 삼기 위해서, 그전에 여부스족이 살았던 성을 공략하는 데 기혼샘을 이용했다고 한다(2사무 5,6~8 참조). 그리고 후에 앗시리아가 침략했을 당시에 예루살렘의 유일한 샘인 기혼샘이 성 밖에 있었기에 히즈키야 왕은 적에게 물을 줄 수 없다고 기혼샘을 덮었다고 한다(2역대 32,2~4). 그리고 성 안의 백성들이 물을 얻기 위해 기혼샘에서 실로암 연못까지 이어지는 지하물길을 팠는데 그 길이가 538m 정도 된다. 이 터널을 가장 몸집이 큰 내가 앞장서서 플래시를 켜 들고 탐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 깊어서 허벅지까지 물이 찼고, 그 다음부터는 발목이나 무릎까지 잠길 정도였다. 직선으로 되어 있지 않고 몇 군데에서 각도를 꺾어 놓았다. 물 흐름의 속도와 양을 조절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돌은 석회암 종류로 반질반질했다. 보통 순례객들은 이곳을 통과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린 보스코 수녀님 덕분에 이곳을 다윗의 병사가 된 듯이 지나갔다. 재미있는 코스였다.

실로암 연못으로 올라오니, 그곳의 팔레스티나 상인은 고대 로마시대의 동전을 팔고 싶어서 아주 친절하게 영어로 이것저것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으나 과감하게 뿌리치고, 다시 성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옛 솔로몬성의 흔적과 역사, 그리고 유다인들의 제사에 대해서 소개하는 박물관에 들어갔다. 아주 아담하면서 깔끔하게 잘 배치되었고 설명도 간결하며 핵심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햇볕이 쏟아지는 통곡의 벽(성전 서쪽벽)에서 기도하는 유다인들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를 잠시 떠올려보았다.
그러고 나서 대사제들의 집터들을 발굴하여 작은 박물관으로 만든 곳을 가보았는데, 개인정결소와 물 저장소 등이 특이했다. 그곳은 유다인 지역이라 양쪽 머리를 꼬아서 귀 옆으로 내리고 모자를 쓴 정통파 유다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오후 4시에 시온 산에서 체나콜로(다락방)와 야고보 성당을 거쳐 마르코 성당에 가는 행렬이 있어서 함께 참석했다. 정 멜라니오 신부는 매우 피곤하여 쉬기로 했다. 체나콜로에서 기도를 하고, 옛 야고보 사도의 무덤터가 있는 동방 정교회 성당까지 행렬을 하여 그곳에서 참배를 했다. 현재 야고보 사도는 스페인의 콤포스텔라(Compo Stella)의 성지에 묻혀 계신다. 행렬은 팔마행렬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했다. 이 행렬에는 윤 요한 신부와 내가 함께했는데, 행렬을 다 마치고 우리 둘은 안 베다 신부님과 노트르담 호텔에 가서 함께 차를 마시면서 노사제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제생활 50년이 넘으신 분으로 들려주실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노사제에게 손자처럼 잘 대하는 윤 요한 신부가 참으로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 일행은 저녁을 먹고, 오후 8시부터 겟세마니 대성당에서 하는 기도와 행렬에 참석하고자 급하게 떠났다. 8시가 조금 지나 도착한 우리는 신자들이 꽉 차 있는 성당에 간신히 들어갔다. 십대 아이들은 성당 밖 계단에서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9시 30분 정도에 기도모임이 끝나고 그룹별로 행렬을 해서 Gallicantu(닭의 울음) 성당, 즉 옛 대사제 관저까지 갔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올리브 동산에 가시어 기도를 하시고, 잡히시어 대사제 관저까지 끌려가신 여정을 함께하는 것이다(마태 26,47~56). 우리 그룹은 겟세마니 대성당의 제대 앞에 있는, 예수님이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던 터에 각자 들어가서 기도를 한 후 행렬을 따랐다. Gallicantu에 가니, 그곳에서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령이라고 하는 그곳 성당은 지하에 예수님께서 갇혔던 곳이라고 추정되는 대사제 저택 전용 감옥이 있었다. 작은 공간인 그곳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걸으셨을 계단에서 묵상을 하고,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한(마태 26,69~75) 베드로 상이 있는 곳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걸어서 숙소에 돌아와 보니 11시가 넘어있었다. 오늘은 참으로 많은 곳을 다녔다.
아침엔 성 목요일 전례 참석, 베들레헴, 목동들의 들판, 아인카렘의 성 요한 성당과 성모님 방문 성당, 그리고 겟세마니 대성당에서의 기도와 옛 대사제 관저(Gallicantu)까지의 행렬과 묵상….

아무 힘없이 끌려가신 예수님의 모습이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존의 법칙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많은 것을 던져 준다. 인간적으로는 실패한 듯하지만 내적, 영적으로는 승리하시는 예수님의 여정이 참으로 힘든 여정임을 깨닫는 하루였다.

크게 감동을 준 예수님의 장례를 재현한 예식
3월 25일(성 금요일), 영어로 Good Friday라고 성주간 프로그램 안내서에 적혀 있었다. 성 목요일을 Holy Thursday, 성 토요일을 Holy Saturday라고 하는 것과는 좀 색달랐다. 혼자서 ‘이날은 미사가 없어서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주님의 무덤 성당 앞으로 갔다. 역시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7시가 되어서야 성당 문이 열렸다. 갈바리아에서 주님의 수난 예절이 있었다. 좁은 갈바리아 경당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예절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행렬용 십자가를 보고 주례자의 행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성가와 독서를 통해서 지금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약 2시간의 예절이 끝나고 우리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와서 차 한 잔씩을 마시고, 10시 30분에 시작하는 ‘십자가의 길’ 행렬에 참여하기 위해 Ecce Homo 쪽으로 한인 신자 몇 분과 발길을 옮겼다. 벌써 사람들로 꽉 차서, 제1처인 ‘사형선고 받으심’을 기억하는 성당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예루살렘의 좁은 골목을 꽉 메운 십자가의 길 참석 신자들로 인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다닐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떤 그룹들은 자신들의 십자가를 가지고 따로 행렬을 했고, 우리처럼 소그룹은 십자가 없이 십자가의 길 각처 경당에서 따로 기도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행렬하는 것은 또 다른 황홀감과 대중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거행이라 생각되었다. 우리는 보스코 수녀님의 차분한 안내로 인해서 각처의 소경당에 들어가서 각처 기도를 하고 잠시 묵상도 할 수 있었다. 윤 요한 신부는 사진을 찍고, 나는 디지털 캠코더로 열심히 찍느라고 기도에 계속 집중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중요한 시기에는 카메라들을 놓고 기도를 했다.
14처의 끝은 주님의 무덤 성당이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셨던 그 길을 성 금요일에 함께했다는 것이 참으로 의미 있고 소중한 체험이 되었다.

오후 3시에는 성 금요일 낮 기도가 있었다. 나만 참석을 했는데, 그것은 Tenebre라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행했던 성 금요일 낮 예식이다. 12개의 초를 하나씩 끄면서 기도를 한다고 해서 Tenebre(어두움)라고 한다. 독서와 응송, 그리고 주례자의 본기도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형태였다. 난 처음으로 참석하는 것이어서 처음엔 무척 신기했는데, 반복되는 형태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 끝나기 전에 숙소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저녁을 좀 일찍 먹고 우리 일행은 오후 7시 10분에 있는 ‘예수님 장례 예식’에 참석하기 위해 움직였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윤 요한 신부와 나는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진 자리의 그리스 정교회 경당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정교회 신부들이 자꾸 밀어내는 바람에 윤 요한 신부를 그곳에 남겨두고, 나는 보스코 수녀님이 있는 자리, 예수님을 염했던 곳 위층으로 갔다. 기다리던 예식이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선두로 주례자 그룹이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왔다. 그곳에서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을 내렸다. 물론 인형이다. 못을 떼어내고, 예수님 상을 따로 천에 싸서 염하는 장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염을 하고 분향을 하고 기도를 한 후에 프란치스코회 수사 한 분이 기둥의 둔턱에 올라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리고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를 설교했다. 그런 후 주님의 무덤 성당으로 갔다. 우리도 그쪽으로 갔지만 그때는 벌써 주님의 무덤 성당에서의 중요 예절이 다 끝난 다음이었다.

‘예수님의 장례 예식’을 보고 윤 요한 신부는 신자들의 신앙교육에 무척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을 하고 ‘어떻게 예수님 상이 떨어지는 십자고상을 만들 면 좋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람에게 보여지는 상징적 행동과 말씀 그리고 느낌 등을 통해서 또 다른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예절이 많은 하루였다. 비록 몸은 피곤했지만 ‘언제 예루살렘에서 이런 예절에 참석하겠느냐?’는 생각에 즐겁게 그 피곤함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피곤한 우리 모두는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듯이 말없이 각자의 침대에서 죽은 듯이 잤다.

성 토요일 새벽에 하는 부활성야 미사
3월 26일(성 토요일), 어제 이곳저곳의 전례에 참석하여 피곤한 몸을 겨우 부추겨서 5시 30분에 일어났다. 6시 30분에 있는 ‘부활성야 미사’를 지내기 위해서다. 토요일 새벽에 부활성야 미사를 한다는 것이 좀 이상했다. 윤 요한 신부의 이야기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전례력에 따라 예식을 하기 때문이거나 오전에만 로마 가톨릭이 무덤 성당을 쓸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했다. 사실 7세기부터 1951년까지 부활성야 미사가 저녁에 이루어지지 않았었다(「전례주년」, 김인영 역, 가톨릭대학출판부, 41-43p 참조).
이 미사 때는 윤 요한 신부나 나나 카메라와 캠코더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온전한 마음과 몸으로 미사에 참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예식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모두가 촛불을 들고 무덤 성당 주변을 세 바퀴 도는 것 말고는 예식상 그리 다른 것은 없었다. 부활찬송, 응송 등을 다 노래로 한다는 것은 예상했던 바였다. 약 3시간의 전례가 끝나고 안 베다 신부님께 인사를 드리니 무척이나 흐뭇해하셨다. 우리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급히 숙소로 돌아왔다.

12시경에 점심을 먹고, 베들레헴으로 향했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는데 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과 경찰이 검문을 했고, 신분증을 요구했다. 그리고 조금 더 가니, 8m 높이의 콘크리트 담이 베들레헴 주변에 넓게 진을 치고 있어TV로만 보던 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주 거점 중 하나인 베들레헴을 완전히 하나의 감옥으로 만들어 놓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기분이 너무나 상했다. 사람이 사람을 가두어놓다니… 조금 지나서, ‘내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반대로 생각을 해보았다.
‘예수님 탄생 성당’의 문은 정말 작았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겸손의 문이라고 하지만, ‘방어’의 목적이 실질적인 이유라 한다. 팔레스티나 경찰들이 여기저기 많았는데, 특이한 것은 곤봉이나 총 등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도구 없이 베레모에 경찰 복장만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성당 내부는 좀 어두웠고, 프레스코화들은 많이 손상되어 있었다. 제대 오른쪽의 제의방을 지나 지하에 있는 예수님의 탄생지로 갔다. 태어난 곳은 작은 제대 밑에 별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약 3m 떨어진 곳에 아기 예수님이 구유에 누워있었다고 하는 자리가 있었다. 우리는 한쪽 자리에 앉아서 보스코 수녀님이 읽는 성경의 ‘탄생 이야기’를 듣고 함께 기도했다.

그곳을 나와서 옆의 성모 성당으로 들어가니, 그곳 지하에 예로니모 성인이 은둔하면서 성경을 번역(‘불가타 성경’으로)하면서 지냈다고 하는 굴이 있었다. 굴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리스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며 그 내용을 묵상하며 살아간 성인의 기도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예로니모 경당의 제대 맞은편에 스테인드글라스로 처리된 작은 문이 있는데 그곳을 통해 먹을 것과 마실 물을 받으셨다고 한다. 역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혼자서 하느님 앞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예식과 더불어 혼자 주님 앞에 나와 있는 시간은 신앙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성인들의 삶을 통해서 많이 보게 된다. 연인들이 둘이서 시간을 보내듯이….

처음 듣는 ‘수유 동굴 성당’(성모님의 수유 동굴). 탄생 성당에서 나와서 10분 정도 걸으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이집트로 피난가다가 성가정이 아기예수님께 모유를 주기 위해 잠시 머문 곳으로 성모님의 모유가 떨어지자 그곳이 하얗게 변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그곳 기념 성당에는 성모님에 관한 성화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고, 구유와 이집트 피난 여정 등을 묘사한 인형세트들이 있었다. 이곳의 이야기로 인해 성모님이 아기예수님께 모유를 주는 장면이 성화들에 그려졌다. 그곳을 관리하는 프란치스코 수사님은 사무실로 우리를 안내해서 여러 가정의 사진과 사연을 보여주었다. 아기를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고 있던 부부들이 이곳 동굴의 돌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고 기도하고는 아이를 가졌다는 기적적인 일을 보고하는 글들, 또는 그런 기적을 바라는 부부들의 사연이었다.
그리고 ‘목동의 들판’으로 향했다. 잘 정돈된 앞마당이 있었고, 한쪽 언덕에는 양들이 풀을 뜯고 있었으며 ‘목동의 들판 기념 성당’은 이탈리아 설계가에 의해 언덕 위에 팔각형태로 지어졌다. 목동들이 천사들의 소리를 듣는 장면부터 예수님 탄생, 그리고 경배드리는 장면까지를 묘사한 그림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옛 목동들이 살았을 법한 집을 보존하고 있는데, 토굴과 비슷했다. 자연적인 토굴을 조금 손본 것으로, 양들의 우리가 한편에 있고 다른 한편은 사람들의 주거공간이었다.

성모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엔케렘(아인카림)으로 갔다(루카1,39~56). 전승에 의하면 엘리사벳이 우물물을 기르려고 왔을 때 우물가에서 성모님을 만나서 집에까지 함께 왔다고 한다.
‘즈카르야의 노래’들이 각국 언어로 적혀있는 ‘세례자 요한 성당’에 차를 세워 놓았다. 이곳은 세례자 요한이 탄생한 곳이라고 하여 기념 성당이 세워진 곳이다(루카 1,57~66). ‘세례자 요한’ 세례명을 지닌 윤 신부에게는 각별한 느낌이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약 10분을 걸어 올라가니 ‘성모님 방문 성당’이 있었다. 먼저 수녀님들이 정성껏 싸 가지고 온 간식을 먹었다. 지상 경당에는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만난 우물이 먼저 보였고, 위층에 기념 성당이 있었다. 그곳에는 성모님과 관계된 교의들이 그림과 함께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네 귀퉁이에는 4추덕(현명:prudentia, 정의:justita, 용기:fortitudo, 절제:temperatia)이 라틴어로 적혀 있었다.
발길을 돌려 나오려고 하는데, 그곳을 관리하는 프란치스코회 수사님과 우연히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통성명이 끝나고, 그 수사님은 자신이 어디어디에서 지냈었다는 것, 이 주변의 러시아 정교회 수녀회의 역사와 현재 상황을 주욱 설명해주셨다.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는데, 이태리말을 편하게 할 사람이 그동안 별로 없으셨던지,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기쁜 날 되시라’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나도 나이가 들면 저렇게 이야기 대상을 찾아다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나이가 들면 더 말하고 싶어진다고 하던데….

오랜만에 저녁식사 후에 시간이 났다. 그래서 셋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새벽 주님 무덤 성당에서의 부활미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조금 일찍 잤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성당에서 한국사람들끼리만 미사를
3월 27일(부활대축일) 새벽 6시에 한국그룹만 무덤 성당 안에서 미사를 드렸다. 안 베다 신부님의 배려 덕택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셋과 안 베다, 대전교구의 은퇴신부님과 그분을 모시고 온 세 자매, 그리고 한국수녀님들이 좁은 곳에서 함께 미사를 드렸다. 텅 빈 무덤이 부활의 상징이 된 그곳에서 우리는 2005년 부활 새벽미사를 드린 것이다.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미사 후 우리는 무덤 성당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못내 아쉬운 이별인사를 했다. 우리 셋이 오후 3시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짐을 싸고 점심을 좀 일찍 먹고, 장 마리아 수녀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텔아비브에 있는 국제공항으로 갔다. 도착을 하고 보니 12시가 조금 넘었다. 다음에는 한국에서 뵙자는 인사를 장 마리아 수녀님과 나누고, 우리는 공항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공항검색이 심하다는 것을 절실히 체험하기 시작했다. 여권검사 때 정 멜라니오 신부의 여권이 이스라엘에 들어오기 이틀 전에 만든 것 때문에 30분 동안 조사를 당했다. 그리고 짐 검사를 몇 시간 동안 받았다.
윤 요한 신부는 비행기 떠나기 30분 전에야 검색대를 통과해서 탑승장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성주간의 느낌을 깊이 체험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무엇보다 우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보스코, 마리아 수녀님, 그리고 안 베다 신부님께 감사의 마음이 가득하다. 그리고 Ecce Homo에서 연수 중이신 세 분의 한국수녀님들과 두 분의 한국신부님들, 대전교구의 은퇴사제이신 신부님을 만날 수 있어서 고마운 순간들이었다.
외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삶으로 사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시는 성령을 느낄 수 있었고, 신앙인의 가장 큰 모범이신 성모님의 향취를 맡을 수 있어서 기뻤다.

지중해를 가로지를 때 감사의 묵주기도를 드렸다. 정 신부는 희랍어 로마서를 읽고 있었고, 윤 요한 신부도 기도를 드리고 있는 듯했다.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할 때, 나는 집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또 다른 순례의 시작이기도 했다. ‘주님의 사랑을 찾고 느끼며 나누는 구도자의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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