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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성경과 함께 - 신약편 195 , 요한 복음서(해제와 묵상)
세나뚜스 조회수:395 222.114.24.13
2016-01-21 10:06:01
3) 로고스(말씀)와 창조 - 안병철 베드로 신부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3절).
여기서는 1~2절에서 소개한 로고스(말씀)에 관한 내용을 마무리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본질적으로는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분이지만, 로고스(말씀)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떠나 세상을 향하고 계시며,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고자 하시는 바로 그곳을 향해 계신다. 그분은 또한 “한처음에 지니셨던” 실존 안에서 드러나 보여지게 될 것을 향하고 계시며, 창조가 이루어지는 바로 그곳을 향해 계신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아주 오래된 본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가 이루어졌음을 선포해왔는데 1코린 8,6이 그 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가 갖다 쓰고 있는 이 찬미가의 단편을 대하면서, 사도 바오로가 아버지 하느님께서 이루신 창조 안에서 아들의 역할을 설정하는 데 얼마나 고심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속사 사용을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해 가고 있다. 즉 창조의 절대적인 기원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찾아지는데, 그 점을 표명하기 위해 ek(…로 부터, …에게서)라는 전치사를 사용한다. 창조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고유한 역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dia(…통해서, …로 말미암아)라는 전치사를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의 신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내적인 중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교회 공동체는 아주 이른 시기에 유다인적인 사고와 이단들의 사고, 두 사고에 맞서 싸워야만 했었다. 즉 유다인 철학자 필론이 말하는 로고스는 단지 ‘중재자’로서의 역할만을 지니고 있었기에 하느님을 순수 영적인 존재로만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요한 복음서를 처음으로 주석한 자들 가운데 하나인 헤라클레온은 영지주의 이단에 속하는 발렌티누스들처럼 로고스(말씀)의 역할을 플라톤 학파에서 말하는 조화의 신의 역할과 비슷한, 그들이 말하는 로고스의 역할로 축소시켜 버렸다. 신약성경 신학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였다. 신약성경 신학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역사(役事)하심의 일체성을 계시의 본질적인 내용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인적인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러한 신학은 아버지 하느님이 모든 것의 절대적 첫 번째 원천이시라는 사고를 견지하고 있다.
3절에서 만들다(epoiei)라는 동사의 수동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egeneto라는 동사가 바로 그 점을 분명하게 해준다. 즉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서 생겨났고”(egeneto)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해서 모든 것을 만드셨다”(epoiei)라는 의미와 같다.
셈족식 표현 방식에서는 긍정적 주장에 뒤이어 그 반대 주장이 바로 뒤따라 나온다. 바로 3절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고”에 뒤이어 “그분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셈족식 표현 방식을 통해 저자는 사고를 강화시켜 나가면서 의미 축소나 의미 약화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시킨다.
우리는 그와 동일한 형태의 문학구조를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
로고스(말씀)의 실질적인 현존 없이는 어느 것도 실존할 수가 없다. 요한 복음서가 쓰여질 당시의 세속 작가들은 세상을 지칭하기 위해 ta panta(모든 것)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했었지만, 요한 복음서 저자는 그들과 달리 관사 없이 panta라는 어휘만을 사용함으로써 우주 전체를 겨냥하기보다는 그 자체로독창성과 역사를 지닌 존재들을 겨냥하려는 경향을 드러내 보인다.
이레네오 교부도 당대의 영지주의 이단들에 맞서, 로고스(말씀)가 이룩한 업적 가운데서 영적인 요소들만을 들춰내기 위한 목적에서 질료적인 세상을 배제시킬 권한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아프리카 출신의 아우구스티노 교부는 로고스가 파리나 벼룩 같은 것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만드셨다고 당당히 주장했었다. 이레네오나 아우구스티노과 같은 교부들의 주장이 가치가 있고 유효하다 하더라도, 요한 복음서 본문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감안하고 있지는 못하다. 요한 복음서에서 panta(모든 것)라는 어휘는 일반적으로 계시와 구원의 맥락 속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로고스의 업적인 창조 안에서 로고스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존재하는 것들은 로고스를 통해서 ‘만들어졌으며’, 로고스는 그것들 안에서 구원자로서의 현존을 해나가고 계신다.

이제 egeneto(생겨났다)라는 동사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egeneto라는 동사를 ‘생겨났다’라고 번역하게 되는데, 그 경우 실존으로 건너가는 과정만을 생각하게 할 위험성이 있다. 사실 과거에 이루어진 한 행위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순과거 시제는 1절에서 로고스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en’이라는 미완료 시제와는 다르다.
다시 말해서 한처음에 ‘계셨던’(미완료시제 사용) 로고스와는 달리 모든 것은 ‘실존하게 된 것이다’(단순과거시제 사용). 이 같은 사실은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해서, 그분을 위해서 생겨났다”고 말한 사도 바오로의 주장에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같은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그 의미가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유다인 전승에 따르면, 창조는 우주의 생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항시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일곱째 날에 창조를 그치셨을지는 모르지만, 창조주로서 그분의 역사(役事)하심은 세상 끝날까지 유효한 것이고, 그럼으로써 구원의 계시를 보다 명료하게 행해 보이시게 되는 것이다. 성경 신학에서는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로고스)은 하느님의 계획과 신비를 점차적으로 계시함으로써 역사의 흐름 속에 현존하시며 활동하고 계신다는 점을 앞다투어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panta(모든 것)라는 용어가 단순히 세상 그 자체만을 지칭하는 의미보다는 다양성을 지닌 피조물 모두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요한 복음서 서문은 ‘한처음에’라는 시간의 근원지까지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하느님께 유보된 영역, 다시 말해서 신성(神性)이 머무는 바로 그 장소의 문턱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여기서 성령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고 있지 않으므로 그리스도교 전승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로서의 하느님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로고스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위격’과 ‘본성’이라는, 희랍적 범주의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와 여럿과의 관계에 대한 모델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출발점에서 하느님 안에 몇몇 폐쇄적인 개체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직 관계만이 자리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실존케 하는 관계이시다.
로고스를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생겨나게 된 창조는 그러한 관계가 ad extra(밖으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로고스를 통해서 생겨났기에 로고스를 통해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느님 곁에 계셨던 로고스는 실존하는 모든 존재들에게 자신의 고유한 표지를 통교하신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 곁에 계시는 로고스를 통해 생겨났으므로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은 하느님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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