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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레지오 마리애 /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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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성경과 함께 -신약편 196, 요한복음서(해제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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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1 10:07:26
2. 생명의 빛이신 로고스 - 안병철 베드로 신부

로고스와 그분께서 실존하게 하신 세상은 과연 어떤 관계일까?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들 안에 현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표명하기 위해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창세기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표현한다(1,27).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모상의 전형(典型)이시기에(로마 8,29) 결과적으로 그분과의 연관성 속에서 숙고되어야만 한다.

상당수의 교회 교부들은 그러한 논리의 토대 위에서 신앙인들을 교육해 왔었다. 하지만 요한 복음서에서는 그런 식의 언어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에 대한 주제와 빛의 상징주의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요한 복음서는 성경 전승의 충실한 상속자임을 자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당대의 헬레니즘이 추구하던 영성적인 갈증들에 대해서도 답변을 해주고 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1,4~5).
1) 생명이신 로고스
4~5절의 관심사는 어둠으로부터 승리를 일구어낸 ‘빛이신 로고스’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최우선적으로 언표되고 있는 것은 빛이 아니라 생명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이 먼저 언급되고, 뒤이어 빛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 있게 보아야 할 것이 바로 그 점이다. 선행하는 3절에서는 생겨난 모든 것 안에서의 로고스의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현존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는데, 여기서는 그러한 로고스의 업적이 생명의 선물로 특성화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어떤 생명을 말하는 것일까? 혹시창조 때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실존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실존’ 자체가 ‘생명’은 아닐까?

성경 전승에 따르면 절대적 의미로는 하느님만이 살아계시며, 그분께서는 더할 나위 없이 “살아계신 분”(시편 36,10)이시고, 실존하는 모든 것은 그분의 숨결에 달려 있다(시편 104,30 : 창세 2,7). 다시 말해서 하느님 없이는 죽음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불어넣어 주신 생명이 우리 인간들 안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생명의 원천이신 그분께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 성경에서 ‘생명’에 대해서 말할 때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실존을 보고 황홀해하거나 각 개체의 한계적인 생명에 대해서 우려하는 모습만 바라보며 이야기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은 도달해야 할 최종 목표이며,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에 상응하게 될 충만한 기쁨을 내포하고 있다. 지혜서에서는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다”(1,14)라고 적고 있다. 자연적인 실존의 의미로 말할 때 “생명”이라 부를 수 있는, 그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실존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통교하시며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신 실질적인 생명으로서, 에덴 동산에서 ‘생명의 나무’가 예고한(창세 3,22) 것이며, 계약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언약하신 바 있는(신명 30,15~16), 그리고 시편 저자가 “당신 면전에서 넘치는 기쁨을”이라는 말로 갈망했던 생명(시편 16,11), 바로 그런 생명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은 실존의 근거지인 이 지상에서부터 하느님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그분과 온전히 하나되어 그러한 생명을 살아가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러한 생명을 살아갈 준비를 항시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생명을 진정으로 향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말씀들을 충실히 따름으로써 그분께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실천적인 삶의 형태가 표명되어야만 한다. 성경에서의 인간은 대화와 친교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살아가는 존재이다.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강요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창조 때부터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대화의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맺으신 계약을 개개인과의 관계를 통해 구체화해 나가기 위한 대화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시 백성에게 율법과 계명들을 지키도록 요구하시며, 그것들을 지키며 살아갈 때 생명의 길에 들어서게 되고,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경건한 유다인에게 있어서 주님의 요구가 어떤 것이든 그것이 바로 생명의 길로 인식되었던 것이다(참조. 잠언 2,19;11,19 : 아모 5,4 : 예레 21,8 : 신명 30,15).

그러므로 요한 복음서 서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생명”이라는 용어는 지속적 실존뿐만 아니라 로고스를 통한 하느님과의 생생하고도 실존적인 관계를 겨냥하고 있다. 4절에 보면 로고스는 생겨난 모든 것 안에서 생명의 항구한 원천이시다. 요한 복음서의 독자들은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주셨다”(5,26), 또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10,10), 또는 “나는 생명이다”(14,6)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요한 복음서 서문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를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2) 빛이신 로고스
주어졌지만 그 충만함에 이르는 것은 단지 기대로만 남아있을 뿐인 “생명”이 지니고 있는 특성상의 모호함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요한 복음서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빛의 상징주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로고스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짧은’ 생명은 그에게 충만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밝혀주는 빛이 되는 것이다.
물리적 의미에서 빛이란 것이 생명의 유지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에서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체험의 한 부분이며(시편 74,16 : 예레 4,23) ‘빛’이란 용어는 욥 3,20에서처럼 때때로 살아 있다는 사실만을 염두에 두기도 한다.
이와 같이 성경 전체에서 광범위한 영역에서 역할을 하고 있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빛의 상징주의는 ‘비추고 있음’을 상기시켜주는데, 여기서 비춘다는 것은 오로지 지적인 질서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체험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그런 식의 은유적 표현은 구원의 실존론적 또는 윤리적 가치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 예로써 시편 27,1과 119,105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빛의 상징이 지혜서 안에서는 직접적으로 신적인 본성에 적용되고 있다. 창조된 빛 그 어느 것보다 더 위에 있는 지혜는(지혜 7,29) “영원한 빛의 광채”(지혜 7,26)로 서술되고 있다. “하느님은 빛이시다”라고 주장하는 요한1서와 달리, 요한 복음서 저자는 이 단락에서 로고스의 본성을 규정하려는 직접적인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4절에 의하면 로고스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에게 빛이 무엇인지를 표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4~5절의 내용을 “생명의 빛이신 로고스가 빛을 비추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생명의 원천인 로고스로 인해, “사람들은 자기들을 생명의 충만함에로 이끌어가는 빛을 보게 된다”는 확고한 인식을 하고 있다. 이 구절은(4절) 예수님의 말씀을 앞서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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