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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가톨릭 인물 이야기 -천주의 성 요한
세나뚜스 조회수:662 222.114.24.13
2016-01-21 10:08:07
   교회 뜨락을 꾸민 한 송이 꽃

이병일 바오로 수사(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원장)

천주의 성 요한의 본명은 요한 시다데(Juan cidade)로 1495년 3월 8일 포르투갈 몬테모르 오 노보(Monte - Mor O Novo)에서 태어났다. 그는 55년의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많은 것을 남긴 사람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여덟 살에 한 순례자를 따라 스페인까지 가서 오로베사(Oropesa)라는 도시에 사는 마요랄(Mayoral)이라는 사람의 집에 맡겨져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마요랄의 집에서 글공부와 허드렛일도 익혀 나갔으며 첫 영성체도 하였다. 요한은 정규수업이 끝나면 가축을 돌보는 목동으로 일했는데, 건강하고 평화로운 들판의 생활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오로베사 백작 군대에 편입되어 1523년 봄 북쪽으로 진군하게 된다. 이 시기가 요한에게 있어서 가장 부끄러운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 시절 군인들은 방종한 생활을 했으며 적은 급료로 인해 가끔은 도둑질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1523년 9월 25일 비엔나 근교에서 격전에서 승리한 후 요한의 군대생활도 막을 내렸다. 요한은 감사기도를 드리기 위해 스페인의 북서부에 있는, 유명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로 성지순례 길에 오른다. 이후 그는 많은 시간을 하느님과의 관계를 묵상하면서 보냈는데, 그에게 있어 자아발견의 시기였으며 고뇌에 찬 그의 영혼이 구원받는 시기이기도 했다.
일자리를 찾던 요한은 북아프리카 수타에 가게 되는데, 그가 자선사업을 시작하지 않은 때였지만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가는 작은 배 안에서 생긴 한 사건을 통해 요한이 지닌 관대함의 깊이나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마음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다. 이곳에서 왕과의 불화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족과 함께 망명하는 포루투갈의 한 귀족을 만났는데,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음을 알고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요한은 수타에서 3년 동안 성벽을 쌓는 일을 하면서 그 가족을 도왔다.
1539년 1월 20일 병사들의 수호자 성 세바스챤 축일, 요한은 순교자들의 암자라는 성당에서 아빌라의 요한(Juan de Avila) 사제의 강론을 들었는데, “예수님을 위하여 고통받는 이들은 행복하다” 주제의 세바스챤 성인의 용기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에 관한 것이었다. 요한은 이 성인의 전기를 몇 차례나 읽어서 그 생애를 훤히 알고 있었지만 강론을 통해 또 다른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철저히 깨어남을 느끼며 안일한 생활에 더는 머뭇거리면 안 됨을 깨달았다.
요한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면서 큰 소리로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그의 회개를 보는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고 야유를 보내고 때리기까지 했다. 결국 몇몇 사람들이 그를 위해 보다 확실한 치료가 필요하다고 왕립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 병원은 이름만 왕립이었지 시설은 형편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아주 작은 방에 갇혀 벌거벗겨져 매를 수없이 맞아야 했다. (그 당시에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 질병이 죄로 인해 생기는 것으로 인식하여 채찍으로 때려서 악마를 병자의 몸 밖으로 내쫓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법이라 여겼다.) 요한은 조금의 자유가 허락되자 비참한 생활을 하는 환자들이 좀더 편안하고 양호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몸을 씻겨주고 불결한 이부자리도 청결하게 해주었다.
요한은 자유의 몸이 되자 제일 먼저 자신의 영적 지도자인 아빌라의 요한 사제를 찾아가 그의 지도 아래 기도와 묵상을 한 달 가량 한 후 과달루페 성지를 순례했다. 그곳에서 성 예로니모회의 수도자들이 운영하는 병원과 의학학교에서 병자간호에 필요한 기본적인 일들을 배웠다.
그라나다로 돌아온 요한은 1539년 12월 말 루체나 거리에 최초의 자선의 집의 문을 열게 된다. 베네가스(Venegas)라는 은인의 도움으로 2층 건물을 빌릴 수 있었고, 그라나다의 주교는 침대와 담요 살 돈을 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오자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봉사의 의미로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그들의 발을 씻어주는 관례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그라나다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는 것을 깨우쳐준 선각자였다. 환자들은 따뜻하고 깨끗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충분히 먹고 투약을 받았으며 또한 사랑 속에서 인간적인 존중을 받았다. 요한은 바쁜 하루 일과가 끝나면 지친 몸으로 무릎을 꿇고 하느님의 보호 속에 자기가 돌보고 있는 식구들을 맡긴다는 기도를 드렸다.
요한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바치는 것을 본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천주의 요한(하느님의 요한)’이라 불렀다. 1540년 스페인 국왕의 고문이며 그라나다를 관할하고 있던 튜이 주교는 요한을 만찬에 초대해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천주의 요한(하느님의 요한)’이라는 칭호를 정식으로 하사했다.
요한의 가장 큰 후원자이며 평생 은인인 세싸 공작부인은 기금 헌납 외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연결시켜주었다. 훗날 스페인의 왕이 된 필립 3세와 포루투갈의 여왕과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된 그의 누이 요안나와 마리아, 그리고 많은 귀족들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요한은 많은 돈과 보석을 기부받아 그라나다로 오다가 중간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부분 나누어 주었다.
요한은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든지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든지 간에 모든 일을 드러내지 않고 행하였다. 왕립병원이 화염에 싸여있을 때는 병원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환자들을 부축하여 문으로 인도하고 걷지 못하는 환자들은 안아서 비상구를 통해 탈출시켰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구조되었다. 요한은 기진하여 쓰러졌으나 불길에 눈썹이 약간 그을렸을 뿐 다친 곳이 없었다.
요한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55세가 되던 해인 1550년 3월 8일, 그가 태어난 날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임종했다. 그를 위한 교회의 장엄한 장례식에는 많은 고위 성직자와 공직자들도 참석했지만 손에 촛불을 들고 긴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가 세운 자선병원에서 온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천주의 요한은 1630년 9월 21일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690년 10월 16일 교황 알렉산더 8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1886년 5월 27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병자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1930년 8월 28일 교황 비오 11세께서는 모든 간호인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하셨다. 유해는 그의 이름으로 봉헌된 스페인 그라나다에 있는 천주의 성 요한 대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가 살아있을 때 직접 수도회를 창설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 의해서 그의 정신을 간직해 온 수사 수도회가 세워졌다. 그는 교황 성 비오 5세의 말씀대로 “교회의 뜨락을 온전히 꾸미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한 송이 꽃”이 되었던 것이다.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는 1572년 1월 1일 교황 비오 5세의 승인을 받아 교황 직속 수도회로 출범하였다.
약한 사람들과 함께 약한 사람들이 되고 그들을 하늘나라의 가장 사랑받는 사람으로 보살펴주며 아버지의 사랑과 전인적 구원의 신비를 선포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며 그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바치는 것이 “환대(Hospitality)”이며, 이는 육신의 아픈 곳을 치료해 주는 단순한 의료행위의 개념을 뛰어넘는 전인적 ‘인간화’를 뜻한다. ‘육을 통하여 영으로’ 육체의 봉사를 통하여 영혼의 선익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이는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인간의 육신을 취했고 지상생활에서도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비롯된 것으로 천주의 성 요한의 정신이 담겨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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