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운영관리 월간 레지오 마리애 / 빛

월간 레지오 마리애 / 빛

게시글 검색
[2006년] 6월 성경과 함께 - 신약편 197, 요한복음서 -해제와 묵상-
세나뚜스 조회수:460 222.114.24.13
2016-01-21 10:09:13
 - 안병철 베드로 신부(서울 노원성당 주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

3) 빛과 어두움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1,5).

5절에서부터 사고의 흐름이 바뀐다. 4절에서는 문법적으로 미완료 시제를 사용했으나(빛이었다) 여기서는 현재형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비치고 있다). ‘비치고 있다’라는 현재형 시제에 뒤이어 ‘깨닫지 못하였다’라는 단순과거 시제가 나타난다. ‘깨닫지 못하였다’라는 표현을 위해 사용된 희랍어 동사는 katalambano인데, 이 동사는 ‘받아들이다, 이해하다, 깨닫다’로 번역될 수도 있고, ‘잡다, 방해하다, 멈추게 하다, 탈취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번역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 동사는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번역의 선택은 내용 이해를 위해서 필수적인 조건처럼 보여진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그 동사를 ‘잡다, 이기다’로 번역하고 있으며, 요한 12,35(“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에서처럼 빛과 어두움과의 적대적인 관계를 근거로 ‘탈취하다, 멈추게 하다’로 번역하는 학자들도 있다.

만일 빛이 비추고 있다면, 그것은 어둠이 빛을 멈추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둠은 빛과 더불어 선존재하거나 같이 존재했었다는 것인가? 결과적으로 어둠으로부터 빛의 승리를 보게 한 과거의 사건은 과연 무엇인가?

1~3절에서는 역사의 주인이시요 창조주이신 로고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창세기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창세 1,2~4).

창세기와 유다이즘에서처럼 요한 복음서 저자에게 있어서 ‘빛과 어둠’이라는 명제는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원초적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심으로써 빛과 어둠을 갈라놓으신 것이다. 성경에서는 빛과 어둠을 늘 대치 내지는 투쟁 상태에 놓고 있다. 그 같은 사실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신 결과로써 나타난다. 그래서 이사 45,7에서는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빛이 어둠으로부터 승리할 것이라는 것이 계시의 첫 번째 내용으로 전달되는데 이사 60,19이나 즈카 14,7 또는 묵시 21~22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어둠으로부터의 빛의 승리는 어둠을 상징하는 밤이 사라지고, 밤 시간에도 빛이 비치게 되는, 다시 말해서 종말에 가서야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부터는 어둠을 뚫고 햇살이 솟구치듯, 빛은 어둠을 없애지 아니하고, 그것을 다스리게 되는데(이사 17,14; 29,7 : 시편 46 : 즈카 14,7) 그것이야말로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리고 인간이 믿음을 통해서 어둠에서 벗어날 때까지 인간이 짊어지고 살아야 할 조건인 것이다. 요한 복음서 서문은 바로 그런 관점을 피력하고 있다. 오직 하느님만이 빛 그 자체이시다. 그분 안에는 결코 어둠이 자리할 수가 없다.
요한 복음서 서문의 흐름을 보면, 피조물의 세상은 마치 빛이 점진적으로 어둠을 정복하는 것처럼 표현되고 있다. 어둠은 빛의 진입을 결코 막아낼 수가 없다. 인간이 처했던 원초적 상황 속에서는 빛도 있었고, 어둠도 있었다. 그렇다면 피조물의 실존이란 어떤 원칙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5절)라는 구절 속에서 사용되고 있는 phainei(비추다)라는 동사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려는 목적에서 현재 시제로 사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구절은 두말할 여지없이 예언자들이 그토록 자주 이스라엘 백성들을 질책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충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항시 그때마다 승리하셨음을 상기시켜준다. 이 구절은 또한 당신의 외아들을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세우심으로써 이룩하신 하느님의 승리를 미리 앞당겨 반영시켜준다. 끝으로 이 구절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형제적 공동체들이 믿음과 사랑을 드러내는 삶을 지속적으로 삶으로써(1요한 2,8) 대다수의 군중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체험을 독자들의 뇌리 속에 자리잡게 해준다.

어둠은 항시 자리하고 있지만 빛을 가로막지는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빛을 가로막을 수가 없다. 하지만 원초적 시간과 지금의 시간 사이에는 차별성이 자리하고 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부터 어둠은 그 기원에서처럼 단순히 ‘부재’ 또는 ‘비실존’이 아니라 실질적인 힘을,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빛을 만드셨고, 그래서 그 빛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 어둠이 빛을 가로막지 못했듯이, 예수님께서도 죽음의 어둠 속에 내던져지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의 승리를 기다리는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자들은 어둠 속을 거닐게 될 것이며,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려는 의도조차 없이 의도적으로 소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요한 9,39).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한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은 끊임없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길로 그들을 초대하고 있다.

로고스는 살아계신 하느님에 대한 표현이며 계시다. 그런데 하느님 안에 있는 생명은 그림자가 없는, 사람들의 빛이다. 그 빛은 어둠과 죽음과 싸우고 있다. 빛의 승리는 어둠과 죽음을 제거해버림으로써 단숨에 쟁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빛과 어둠의 투쟁은 끊임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승리는 보장되어 있다. 그 점이 바로 인간 역사의 의미를 드러내주는 초석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katalambano라는 동사의 의미를 ‘멈추게 하다’ 또는 ‘가로막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며 이해하려 했다. 새 번역 성경에서는 그 동사를 ‘깨닫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그 동사를 ‘깨닫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는 요한 1,10~13 : 에페 3,18 : 필리 3,12~13 : 사도 4,13;10,34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은 로고스(말씀)가 창조 안에서 처음으로 표명되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참조. 1코린 1,21 : 로마 1,19~23 : 지혜 13,1~19).
비치고 있는 빛 앞에서 인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은 1,9~13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빛의 승리는 원칙적으로 선포되었는데, 그 점은 요한의 증언을 통해서 분명하게 표명되고 있다.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