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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성경과 함께 - 요한복음서(해제와 묵상)
세나뚜스 조회수:459 222.114.24.13
2016-01-21 10:16:09
  요한복음서(해제와 묵상)

- 안병철 베드로 신부(해외 유학) -

3) 로고스를 맞아들임(1,12-13)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선행하는 내용 속에서는 세상이 로고스를 거부하는 모습을 전해준 바 있다. 여기서는 요한 복음서 서문에서, 상반되는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유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용어로써 선행하는 내용과는 달리 하느님께서 로고스에 대한 믿음을 야기시키고 계시는 모습을 전해준다.
1,12~13은 상당히 난해할 뿐만 아니라 수사본 전승 자체도 매우 유동적이다. 그래서 상당수의 비평학 학자들은 이 구절들 속에서 우연하게 첨가된 것이라 판정된 요소들은 과감히 삭제해야 옳을 것이라고까지 주장하지만, 우리로서는 현재의 구조 자체를 인정하면서 살펴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자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이들’, 이들은 모두가 동일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행위의 차원에서 보면 동시 다발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다. 즉 ‘받아들이다’와 ‘낳다’라는 동사는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행위를 의미하는 단순과거 시제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분의 이름을 믿는다’에서의 동사는 현재형 시제로 사용됨으로써 믿는 사람의 실질적인 현재 상태를 지적해 준다.
그런데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 사이에 또 다른 과거형이 사용되고 있다(권한을 주셨다). ‘자녀가 되다’에서의 ‘되다’라는 동사는 새로운 사건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가올 미래나 현재 상태를 특징적으로 표현한다고 하기보다는 실존과 현현에 있어서의 변화를 표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각 구절 안에 담겨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세부적으로 분석해 살펴보기에 앞서 1,12~13의 전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먼저 요약해 보기로 하자.

12절에서는 어느 시점에선가 로고스를 받아들여 그분의 이름을 믿게 된 자들이 보여준 긍정적인 응답을 가장 먼저 진술해 준다. 긍정적인 응답의 결과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물론 인간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하느님만이 로고스를 받아들이게 하여 믿음을 갖게 하실 수 있으시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온전히 대체하고 계시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로고스를 맞아들인 것이지만,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전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각 인간의 행위와 하느님의 역사하심 사이에는 그 어떤 시간적인 간격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의 행위와 하느님의 역사하심은 동시성의 모습을 띠는 것이다. 인간이 계시자와의 만남을 통해 하느님 없이 새로운 탄생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중대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요한적 사상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영을 통해 새로운 탄생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확고부동한 구약적 전승에 상응하는 것이다(로마 8,15~18 : 갈라 4,6).

이제 요한 1,12~13을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받아들이는 이들
그들은 로고스 안에서 자기들 실존의 근거와 로고스가 전해준 생명의 언약 안에서 자기들 역사의 의미를 깨달은 자들이다. 이들은 로고스께서 자기들을 이끌어가시도록 그분께 자신들을 내놓은 자들이다.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1,10)라는 사실을 표명하기 위해 사용된 ‘알아보다’(ginosko)라는 동사와 달리, 1,12에서 사용되고 있는 elabon이라는 동사는 1,11에서 사용된 ou parelabon(맞아들이지 않았다)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서 개인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는 ‘친교’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1,12에서의 “모든 이”에 앞서 1,11에서 “받아들이는 이들”을 먼저 언급함으로써 본문은 로고스 사건이야말로 모든 시대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음을 강조해 준다. 로고스를 받아들이는 것 이외의 그 어떤 조건도 제시되고 있지 않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이들
요한 복음서 저자는 각자가 로고스를 받아들임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분의 이름을 믿는 상태’에 놓여지게 된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이름을 믿는 것일까? 이에 대한 응답은 요한 복음서 서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요한 복음서 서문이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에게는 ‘그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 두말할 나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요한 2,23;3,18 : 1요한 3,23;5,13).
그러나 14절에 가서야 비로소 강생한 로고스가 문제시되고 있다고 보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그분의 이름을 믿는다’는 문장 형식은 때때로 야훼라고 불리는 주님을 요한적 방식으로 로고스에게 적용하게 되는데, 이 경우에는 ‘주님의 이름을 신뢰한다’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참조. 이사 50,10 : 시편 33,21).
이름이란 본질적으로 한 인격을 표현하는 더할 나위 없는 방식이기에 ‘그분의 이름을 믿는다’라는 것은 결국 ‘그분을 믿는다’라는 것과 대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분의 이름을 믿는다’라는 문장 형식을 직접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이 14절에 가서야 구체화되고 있기에 ‘그분의 이름을 믿는다’라는 표현을 즉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해석하기에는 어려움이 뒤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강생 이전의 로고스에다가 구약성경에서의 주님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서의 예수님을 투영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을 주셨다
이러한 표현이 희랍어에 있어서는 매우 난해하다. 의미상으로 본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쉬울 수가 있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 하나하나가 다 간과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주셨다’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로고스께서 인간에게 선물을 베푸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믿는 자들에게 권한을 주셨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어떤 권한을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는 마치 신앙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독자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권한을 의미하는 ‘exousia’라는 희랍어 용어의 용도를 살펴보아야만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데, 다음 호에서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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