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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호 - 우리교구의 성지(한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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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1 12:43:41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완벽한 성지
                                                           - 한티 순교성지 -


한티의 위치 

대구에서 북쪽으로 28Km,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위치한 한티는 깊은 산골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 산괴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태백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이르는 팔공 산괴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 등 5개 군에 걸쳐 있으며, 그 장구한 산줄기의 배면을 동북에 돌리고 대구 분지에 전면을 두어 병풍과 같이 대구의 북쪽을 가리고 있다. 팔공 산괴의 주봉에서 가산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산과 주봉인 팔공산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고향땅을 떠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신자촌의 형성

유교의 전통이 강했던 영남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신유박해(1801) 이후였다. 박해를 피해 서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의 신자들이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상주 등으로 피난하여 신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잠시 동안 외부와 격리된 이곳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중앙정부의 관여 없이 지방관에 의한 국지적인 박해인 을해박해(1815) 때에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등지의 많은 신자들이, 정해박해(1827)때에는 상주 지역의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끝까지 배교(背敎)하지 않고 굶주림과 온갖 고문의 역경 중에도 옥사하지 않은 신자들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이때 대구 감영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과 형제들이 그들과의 연락과 옥바라지를 위해 감옥과 비교적 가깝고 안전하다고 판단한 이곳 한티에서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자들이 생계를 연명하거나 옥바라지를 위해 낮에는 사기를 구웠고, 밤에는 인근 원당마을이나 신나무골로 성사를 보러 다녔다. 밤새워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로 옮겨 다녔기에 “천주교 신자들은 축지법을 쓴다.”는 말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한티에서 가장 먼저 순교한 교우는 이선이 엘리사벳과 아들 배 스테파노이다. 이들은 경신박해를 피해 신나무골에서 한티로 피난 왔다가 이곳에서 순교했다. 지금 이선이 엘리사벳은 신나무골로 옮겨져 안장돼있다.

  
병인박해와 한티 성지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 살던 김응진 가롤로(김현상의 차남) 가정과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및 그의 숙부 서익순과 노곡동 송 씨 가정과 신나무골의 여러 신자들이 한티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그해 봄 문경 한실 서태순 베드로가 잡혀 상주 감영에 끌려갔다가 12월 19일 순교하니 조카 서상돈이 그 시신을 한티에 안장하였다. 1867년 박해가 잠잠해지는 듯하자 서익순과 이 알로이시오가 한티에서 대구로 내려가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절두산에서 백지사를 당하고 한강물에 던져져 순교한다.

1868년 음력 4월 17일에 독일인 옵페르트(Oppert)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선참후계(先斬後啓)령을 내려 박해에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1868년 봄 한티에 포졸들이 들어와 재판과정도 없이 배교하지 않는 조 가롤로를 비롯한 30여 명의 신자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달아나는 신자들은 뒤따라가서 학살하였다고 한다. 포졸들이 물러가고 난 뒤 살아남은 신자들이 한티에 돌아와 보니 동네는 불타 없어지고 온 산 곳곳에 시신이 썩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썩어서 옮길 수조차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 매장을 하였다고 한다(현재 한티의 순교자 묘역의 묘는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한편 당시의 공소 회장이었던 조 가롤로와 부인 최 발바라와 그의 누이동생 조아기의 시신은 사기굴 바로 앞에 있던 그들의 밭에 나란히 묻었다. 그리하여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던 신자촌이며 또한 그들이 처형을 당한 순교지였을 뿐 아니라 순교자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완전한 순교성지가 되었다.

  
한티 공소의 재건

1868년 박해의 칼날을 받은 한티 공소는 한줌의 재로 변한다. 박해의 먹구름이 지나간 뒤 마을에 살던 박만수 요셉은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을 모아 공소 재건에 앞장선다. 먼저 순교자들이 살던 마을(순교자 묘역 대형 십자가 뒤편)은 ‘하느님을 증거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피가 서린 거룩한 곳이므로 우리 같은 죄인이 밟을 수 없다’ 하여 바람맞이 땅(현재의 공소가 재건되어 있는 곳)에 새로이 마을을 이룬다. 또한 당시 공소회장이던 조 가롤로의 아들 조영학 토마tm(당시 12세)에게 집을 지어주고 공소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그 무렵 군위 칫솔에서 김재윤 플로리아노 가정과 김윤하 가정이 들어오고, 신나무골의 배순규 가정과 조규성 프란치스코 가정이 들어왔다.

1882-1883년 김보록 로베르토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면서 한티에서 성사를 집행하였다. 이때 신자 수 39명, 고백성사자 20명, 영성체자 19명, 세례자 3명, 혼배자 1쌍이었다. 1885년 대구본당이 설정되어 김보록 신부가 인근의 신나무골에 정착하게 되니, 김보록 신부도 한티에 자주 왔고, 한티 신자들은 대축일이면 신나무골로 미사참례 하러 갔다. 이후 한티 공소는 새로이 번창하여 1900년 초에는 공소 신자 수가 80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나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전교를 위해, 또한 생활이 불편한 이곳을 떠나 살기 좋은 곳으로 이주함으로써 공소는 쇠퇴하게 되었다.

한티 순교성지에는 모두 37기의 묘가 있다. 순교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묘의 대부분인 33기는 무명 순교자의 묘지이다.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의 묘는 조 가롤로 공소회장과 그의 가족(최 발바라, 조아기)의 묘, 서태순 베드로의 묘로 4기뿐이다.
  

한티성지의 조성과 현재

한때 번성하던 한티 마을은, 사람들이 점차 편리한 생활을 위해 떠나가면서 세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한티가 다시 교회로부터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1967년 9월 순교자성월에 대구대교구 액션 단체 주관으로 순례가 시작되면서부터다. 그 이후 개인이나 단체별로 한티성지에 대한 순례가 이어졌다. 1983년부터는 매월 마지막 주일 순교자 현양 미사가 봉헌되기 시작했으며 순교성지 개발을 위한 부지 매입 및 조사가 시작되었다.

1988년 5월에는 무명 순교자 묘 24기가 확인(3기 이장, 합묘 확인 2기)되어 성지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으며 드디어 1990년 2월에 한티 순교 성지 피정의 집을 착공하기에 이른다.

1991년 9월에는 무명 순교자 묘 9기가 추가로 확인되어 유명 4기, 무명 33기의 현재 파악하고 있는 순교자 묘가 전부 발굴되었으며, 한티 순교 성지 피정의 집이 9월 29일 완공되고, 1995년 3월에는 성지안내소가 완공되었다.

1997년에는 대구 대신학교 1학년 신학생들이 머무르며 공부하게 될 영성관을 착공하고 2000년 2월 17일 축성하기에 이른다. 한편 한티성지는 2000년 대희년을 맞아 대구대교구 대희년 전대사 순례성지로 지정되어 더욱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해부터 순교자 성월 대구대교구 지구별 한티 순교성지 순례미사가 봉헌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2004년 4월 13일에는 순례자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순례자의 집을 기공하여 같은 해 12월 10일 축복식을 거행했다.

  
이러한 과정으로 조성된 한티 순교성지는 사시사철 변화무쌍해지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외교인들로부터도 사랑받는 순교성지가 되었다. 특히 무명순교자 묘역을 돌면서 바칠 수 있는 십자가의 길 14처는 순교자들이 살고, 죽었으며, 묻혔던 바로 그 자리에서 순교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영광을 묵상할 수 있어, 한국교회의 자랑인 순교신심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장소라고 추천하고 싶다. 또한 한티성지에서 지척의 거리에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한티에서 순교)의 묘와 대구교구 첫 본당 터가 있는 영남교회의 요람지 신나무골 성지가 있어 이 두 곳을 반드시 함께 순례하기를 권하고 싶다.

  

참고 - 차기진, 사목 252호(2000년 1월호)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한티 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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