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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위한 향기로운 기도
세나뚜스 조회수:340 222.114.24.13
2016-01-25 21:37:08
▲ 이해인 수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시인) 



현재 암으로 투병 중인 내게 주위 친지들이 바쳐준 묵주기도의 향기를 느끼고 있는 나는 그 덕분으로 오늘까지 살아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더러는 나에게 표현을 해서 알지만 표현 안 하고도 묵주기도를 하면서 나의 쾌유를 빌어준 이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어떤 교우는 나의 쾌유를 빌며 3만 단 이상 바치고 있는 중이라고 문자를 보내주고,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공동 묵주기도 소식도 전해줘 나를 거듭 감동시킨다.

성당 안에서 기도하는 묵주 외에 침상용 묵주, 주머니 안의 묵주, 여행용 묵주, 성모상에 멋으로 살짝 걸어둔 묵주, 그리고 세례 받을 이에게 선물하기 위해 모아둔 묵주까지 다 합하면 나는 수십 개나 되는 묵주를 지닌 묵주 부자다. 

산책하면서 또는 잠들기 전에 침상에서 묵주기도를 바칠 때면 나는 성모님께 늘 죄송한 마음이 들곤 한다. 이런 저런 분심을 떨치지 못한 채로 기도를 계속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도하는 것 자체를 하늘엄마는 어여삐 여겨주시겠지 생각하면 작은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내가 묵주기도를 가장 분심없이 간절하게 바친 것은 여고 시절 경주 김유신 장군 묘소에서 열린 제2회 신라문화제 전국고등학생 백일장에 나갔을 때였다. 경주 어느 성당에 들어가 얼마나 열심히 구체적으로 기도했는지! 이기적인 욕심이지만 겸손을 다해 나는 간청했다.

'성모님,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대표로 내보낸 학교의 명예와 선생님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1등까진 바라지 않으니 장려상이라도 받길 바랍니다. 오늘 백일장에서 주어지는 제목이 제가 쓰기 쉬운 것으로 나오게 해주세요. 이 기도가 이뤄지면 앞으로 더욱 당신을 섬기는 일에 충실하겠습니다….'

그 때 심사위원장은 청마 유치환 시인이었는데, 전국에서 모여온 수백 명의 남녀 예비 시인들 중에 내가 '산맥'이란 제목의 시로 장원을 한 것은 기적처럼 여겨지고 나는 성모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확신했다.

하루라도 묵주기도를 바치지 못한 날은 무언가 허전하고 아름다운 의무를 다하지 못한 죄책감을 갖기도 한다. 그동안 나는 빛깔도 모양도 예쁜 묵주를 선호했는데, 이제는 그냥 단순한 모양의 나무묵주가 좋다. 임종한 수녀님들이 수도복을 입고 온전한 침묵으로 누워있을 때도 손에 걸린 나무묵주는 슬픔 중에도 애틋하게 아름다웠다. 

얼마 전 나는 성지순례 가는 지인에게 부탁해 각 단마다 베네딕도 성패가 붙어 있는 나무묵주를 하나 구해서 요즘은 그 묵주를 길들이고 있다. 환희, 고통, 부활, 빛의 신비 등 매 신비를 바꿔서 묵상할 수 있고 각 단마다 무언가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특정한 지향을 갖고 기도할 수 있는 묵주기도야말로 얼마나 폭넓고 멋진 기도인가. 묵주기도가 없는 세상은 얼마나 삭막한가. 

누가 내게 '수녀님을 위해 묵주기도 한 꿰미 바칠게요'하는 말을 들으면 갑자기 든든하고 행복한 마음이 된다. 나도 다른 이에게 묵주기도한다는 약속을 많이 하고도 다 채우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이어서 때론 몹시 걱정이 되지만, 이런 조바심마저 성모님께 봉헌하기로 한다. 

아주 오래 전 마음으로 힘든 시기에 묵주기도를 바치고 잠들면 성모님이 우리 수도원 복도에서 나를 손짓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꼭 한 번 체험한 그 느낌이 하도 감미로워서 늘 잊지 못하고 있다. 부산 광안리 바닷가 수녀원에서 세상 사람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음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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