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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성경과 함께 - 신약편194
세나뚜스 조회수:699 222.114.24.13
2016-01-21 10:04:02
     요한 복음서
-해제(解題)와 묵상-

안병철 베드로 신부


말씀은 하느님이셨다(1ㄷ)
Theo′s(하느님)이라는 용어는 1ㄴ에서(“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사용된 것과 같지만, 여기서는 1ㄴ에서와 달리 정관사가 없이 사용되고 있다. 이 구절에서의 주어는 말씀이지 하느님이 아니다. 그러므로 Theo′s(하느님)라는 용어는 주어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할 것은 복음서 저자가, 로고스가 신적(神的: Theio′s)이라고 선언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복음서 저자는 1ㄴ에서처럼 하느님이라는 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1ㄴ에서는 하느님이라는 명사에 관사를 덧붙여 사용했지만, 여기서는 관사 없이 사용하고 있기에, 1ㄴ과 1ㄷ에서의 하느님 사이에 차별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1ㄷ에서의 로고스(말씀)는 아버지이신 분께 유보된 하느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하느님은 지금 설명해가고 있는 그런 하느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즉 창조를 상기시켜주고 있는 3절에서 표명하게 될 의미로서의 하느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이 경우 ‘로고스(말씀)는 하느님의 영역 안에 계셨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성경적 사고에 따르면, 한 인격은 자신에게만 있는 배타적이고 고유한 것을 실질적으로 통교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어느 한 성조가 행한 축복은 고유한 의미에서 그에게 고유한 무엇인가를 통교하되 양도할 수 없는 방식으로 통교함으로써 자신의 실존 자체를 확장시켜가는 것이다. 하느님을 성경적으로 표상하는 데 있어서 그러한 개념이 그대로 옮겨지는 것은 아닐까? 지혜서 7,25~26과 같은 성경 본문을 통해 그러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지혜 7,25-26).
지혜와 말씀(로고스)과의 강한 유사성은 로고스와 하느님이 동시에 둘이면서 하나인지를 요한 복음서 저자가 어떻게 설명, 주장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구약성서에서는 야훼 하느님을 지칭하기 위해 다양한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주님의 천사, 정의, 진리 등등). 그처럼 구약성서에서 지혜는 주님성이 손상되지 않은 채 세상에 오시는 그런 주님에 대한 대역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지혜가 그 기원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말하면, 그것은 로고스(말씀)에 관계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1절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는 가장 오래된 글들을 통해서 예수님과 구약성경에 나오는 지혜가 동일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지혜’(1코린 1,24. 30)라고 명명한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의 초월적 실존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모든 피조물의 맏이’(콜로 1,15 : 잠언 8,22~31 참조)라고 부른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을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1,3 : 지혜 7,25 참조)으로 특징짓는다. 신약성경의 그러한 표현들에 뒤이어 요한 복음서 저자는 구약성경에서 하나의 표상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의 실재 자체를 말씀(로고스) 안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는 모든 피조물에 앞서가는 하느님의 업적으로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낳으신 것이라고(잠언 8,22 : 집회 24,3.9) 규정되어 있지만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요한 복음서 서문에서는 그러한 사고를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사고와 반대되는 사고를 피력한다. 즉 “말씀이 하느님이셨다”라는 주장은 ‘지혜’를 노래하는 찬미가들 속에서 지혜의 기원에 관계되는 것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솔로몬의 시가와 같은 후기 지혜문학 글들 속에서 지혜는 하느님 자체로 관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지혜의 인격화가 매우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지혜 7,22 이하).

요한 복음서 저자는 로고스(말씀)가 단지 신적인 존재(Theio′s)가 아닐 뿐만 아니라 하느님(Theo′s)이시라고 선언함으로써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앞서 나간다. 요한 복음서 본문은 ‘둘’에서 ‘하나’로, ‘하나’에서 ‘둘’로 방향을 잡고 있다. 그런 움직임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의 신비를 특징적으로 표명하고자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로고스)이 ‘아들’이 되시기 위해 강생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서 ‘아버지’라고 불리지 않는 한, 이원성(二元性) 보다 우세한 것이 일체성(一體性)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시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말씀(로고스)과 하느님이라는 관계에 즉시 투영시키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다. 즉 하느님의 단일성은 개체적 존재의 단일성이라는 것으로 축소되기를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단일성은 오히려 역동적인 관계를 전제함으로써 한 실존의 확장을 가져오게 된다.
관계라고 하는 것만이 한 실존의 깊이를 특징지어 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관계라는 끈을 끊어버리는 순간부터 오류 속에 빠져들거나, 아니면 요한 복음서 서문 1절에서 연이어 전해준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셨다”라는 표현들을 통해 극히 난해한 가운데서도 애써 전해주고자 한 신비 가운데 어느 한 부분만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쳐버릴 수가 있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2절)
2절에서는 1절에서의 두 가지 주장들을 잘 요약해 준다. 여기서는 창조의 시작과의 관계 속에 있는 로고스(말씀)의 상황과 하느님과 함께하는 말씀의 실존에 관한 내용을 강조해 준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로고스(말씀)가 그분 자체 안에 계시다고 고백한 후에 ‘한처음에’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말씀의 기원에 대해 다시 언급한다.
이렇게 해서 요한 복음서 저자는 다시 한번 창조의 순간에로 눈을 돌리고 있다. 그는 ‘한처음에’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되풀이해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의 시선을 창조에로 몰아가고 있다.
‘말씀’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들에게 통교하시는 ‘밖으로’의 통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하느님께서는 말씀(로고스) 없이 어느 한 순간도 실존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단숨에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는 것이다. 항시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말씀(로고스)은 인간들과의 대화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향해 방향을 돌리고 계시다는 표현인 것이다. 한처음에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2절의 본문은 창조된 피조물 세상 역시도 부르심을 통해 하느님과 함께하도록 불렸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것이 아닐까?
이 구절에서 요한 복음서 저자가 하느님 앞에서의 로고스의 신적인 조건에 관한 핵심적인 내용을 다시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로고스가 취해야 할 근본적인 자세에 더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고스가 하느님 앞에서 취해야 할 근본적인 자세는 말씀으로 태어나게 될 모든 것의 모델이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12~13절에 의하면 로고스(말씀)는 그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실 것이다. 그런데 로고스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현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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