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더프의 생애

  • 1889년 6월 7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출생

  • 1921년 9월 7일 레지오마리애 창설

  • 1965년 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대표 참가

  • 1980년 11월 7일 선종

  • 1996년 6월 4일 더블린 대주교 시복 청원

프랭크 더프의 아버지 존 더프(John Duff)와 어머니 레티시아 수잔 프레힐(Letitia Susan Frehill)은 1888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결혼하였으며 둘 다 공무원이었으나 레티시아는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었다. 1889년 6월 7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그들의 첫아들이 더블린 시에서 태어나고 이틀 후에 프랜시스 마이클(Francis Michael)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평소에 프랭크(Frank)라고 불리었다.

그의 부모는 여섯 아이를 더 낳았는데 그 중 둘은 아기 때 죽어 가족은 모두 7명이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면서 기도가 습관이 되도록 가르쳤고 덕을 쌓도록 단련시켰으며 미사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부모는 또한 밤이 늦도록 독서를 하곤 하여 프랭크도 유년시절부터 책을 손에 잡았다. 후에 그의 영적 성장에 큰 영향을 준 뉴먼 추기경의 저서들도 이때 처음 접하게 된다.

그의 평온하던 가정은 부친과 함께 그가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으며 다행히 둘 다 회복되었으나 부친은 후유증으로 평생 고생하면서 어렵게 변하였으며 그는 수녀원에서 경영하는 사립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이사로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로 전학하였다. 1899년 그의 나이 10세 때 성령 수도회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운영하는 블랙록(Blackrock) 학교로 다시 전학하여 첫 고백과 첫 영성체를 하였다. 그는 비록 키가 큰 편은 아니었으나 몸이 튼튼하고 강인하였으며 운동을 좋아했으나 그가 12세 때 크리켓 공이 그의 귀 뒷부분을 강타하여 평생 청각 장애인이 되었다.

그는 학창시절에 공부도 잘하였으며 아일랜드어, 영어,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등 5개국어를 하였다. 문학에 소질이 있어 최종 학년 때에는 현대 문학 부문에서 1등 상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그는 18세 때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부친이 건강상의 이유로 이미 은퇴하여 궁핍해진 가정을 위해 장남으로서 가족을 부양을 위해 직장을 구해야 했으며 가문의 전통대로 공무원이 되어 농림부에 근무했으나 그의 명석한 논리적 사고와 수학적 두뇌로 인해 재무부로 전근하고 21세 때 그는 새로운 계산법을 창안해 냄으로써 런던에 초빙 받아 재무성 관리들에게 시범을 보이기도 하여 그가 창안한 방법이 채택되어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그는 1933년까지 공무원으로서 일하였다.

1913년, 24세 때 그는 레지오 창설에 큰 영향을 준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가입하였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교리를 깨닫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생애를 180도 전환시키게 된다. 어느날 직장 상사가 그에게 빈첸시오회에 가입하도록 종용하였다. 빈첸시오회는 평신도인 프레데닉 오자남(Frederic Ozanam, 1813-1853)이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의 정신을 이어받아 애덕을 실천하고 빈민구제사업을 하기 위해 1833년에 프랑스의 파리에서 창설한 평신도 사도직 단체이다. 그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남성들만이 이 회에 가입할 수 있었다.

당시 더블린에서의 가난은 처참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실업상태에 있었고 굶주림과 불결과 술에 만취된 생활이 만연했다. 종교적인 냉담은 갈수록 심는데 빈첸시오회의 목적은 극빈자들을 구제해 주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영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다. 프랭크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빈첸시오회의 좌우명이었다. 그것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이었다.

빈첸시오회는 기도와 영적 독서로 시작되었다. 회의록이 작성되고 활동보고가 있었으며 훈화가 뒤따랐다. 이는 훗날 레지오 마리애의 회합 순서가 된다. 프랭크는 빈첸시오회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열렬한 빈첸시오회 회원이 되었다.

프랭크가 영원한 생명을 목표로 정한 것은 두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즉, 영적 독서와 봉쇄피정이다.
그는 1911년부터 영적 서적들 특히 성인전을 즐겨 읽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성인들의 사랑은 그에게 성인이 되고자 하는 원인를 주었다. 그는 “성성(聖性)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임을 우리가 일단 받아들이면 그것을 위해 애쓰는 것은 지극한 일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외에도 그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위대한 영성 신비가들의 주요 저서들을 읽을 수 가 있었다.

또한 그는 빈첸시오회에 들어간 지 두 달 만에 첫 봉쇄피정에 참가하였다. 그 피정은 예수회 신부가 강론하면서 지도했는데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그때 피정의 가치와 중요성을 깨닫게 되어 매년 두 차례씩 피정을 하였다.

그는 24세쯤 가르멜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한 후 기도하는동안 갑자기 그가 지닌 신앙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신앙이란 원래 하느님의 선물이며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전보다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또 프랭크는 예수회 신부를 영적 지도신부로 삼아 고해성사도 받고 영적 지도도 받았다. 그는 영적 지도자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1916년에 그의 처녀작인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가 출판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성성(聖性)과 완덕에 이르는 여러 가지 의견과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1915년 10월에 처음으로 아일랜드의 북서부에 위치한 락 더그(Lough Derg) 섬에 갔다. 그곳은 인적이 없는 황량한 볼모지로서 호수 가운데 있는 작은 섬에 폐허가 된 옛 수도원이 있었다. 이 여행은 참회와 고행을 하기로 결심한 데 따른 것이었는데 그곳까지의 여행은 길고도 지루했으며 참회와 고행은 퍽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2명을 이끌고 그 다음해에도 그곳으로 순례하였다. 이 순례는 나이가 74세가 되어 중병으로 더 이상 갈 수 없을 때까지 49년간 계속되었다.

그 당시 더블린의 어느 개신교에서는 극빈자들을 대상으로 개종회관에 조반센터를 두어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조건으로 주일 아침 식사를 무료로 제공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난한 천주교 신자들이 개신교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크게 우려한 프랭크는 1914년 초 몇 명의 협조자와 함께 조 가벳(Joe Gabbett)의 지휘를 받으면서 개신교 개종회관 근처에 무료 급식 가톨릭 조반센터를 마련하였다.조 가벳은 구두수선 및 제화공으로서 풍채가 당당한 영국 퇴역 군인이었으며 개척자회 회원이었다. 이 회는 절대 금주 개척자회라고 불렀는데 1898년 예수회 신부에 의해 더블린에서 창설되었다. 이 회의 목표는 기도와 희생을 통해 절대 금주를 장려함으로써 예수성심을 흠숭하는 것이었다. 프랭크 역시 열렬한 예수 성심 신심가였기에 개척자회에 가입하여 2년간의 수련기를 거쳤다. 그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군사로써 개척자회의 예수 성심 배지를 착용하는 것을 명예로 여겨 죽는 날까지 달고 다녔다.

아일랜드의 독립 운동을 위한 부활절 혁명이 일어나자 가벳은 영국군에 입대하면서 그의 소유물 중 일부를 프랭크에게 주었다. 프랭크는 그것들을 빈첸시오 회관인 마이러 하우스(Myra House)에 보관했는데 그 중에는 채색된 석고로 만든 성모상이 있었다. 이 성모상은 기적의 메달 성모상과 같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상’으로서 후에 레지오의 첫 회합 때에 사용될 성모상이었다.

부활절 혁명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1916년 4월에 일어났는데 독립 전쟁으로 확대되어 1921년까지 5년간 계속되었다. 마침내 영국 정부는 런던에서 아일랜드의 대표단과 함께 협정 체결 협상을 하게 되었는데 정부 관리였던 프랭크도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보고서 작성을 도왔다.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협정은 레지오창설 3개월 후인 1921년 12월에 조인되었다. 그 후 그는 아일랜드 최고 지도자 개인 비서로 1년간 일하기도 하였다. 프랭크는 16년간이나 조반 센터를 운영하면서 가톨릭 신자의 개신교 개종 센터 이용을 감시함으로써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결국 개신교 개종 센터는 이용자 부족으로 문을 닫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날 저녁 프랭크는 빈첸시오회 회관에서 어떤 강사가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이란 책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는 것을 보았다. 저자인 몽포르의 루도비코와 그 책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도 없었고 강사의 설명도 흥미를 주지 못해 그 일을 잊어버렸다.

독서를 좋아하는 그가 헌 책방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영어로 번역된 그 책을 발견하게 되어 즉시 구입하였다. 그런데 내용이 과장되고 비현실적이며 이치에 맞지 않는 다고 여겨져 실망하였다. 그 당시 빈첸시오회 회장으로서 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직장상사가 그에게 그 책을 다시 읽도록 권유하여 재통독 하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후에도 두세 번 더 읽었으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 어느날 그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섬광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는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일종의 빛처럼 그 책이 진실임을 인식하게 되었고 비현실적이고 과장되었다고 여겨지던 내용들이 진리라는 확고한 신념이 생겼다. 이 책에서 내가 지나치다고 여겼던 것들은 사실상 성모님께 대한 내 지식과 이해의 부족으로 기인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마리아께 대한 크나큰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께 보낸 그의 편지에서 1914년 이래 5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묵주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그러한 성모신심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 대한 그의 지식이나 이해에 틈이 생겼기에 그는 성모학(Mariology)을 공부해야겠다는 의무감을 가졌다.

그런데 뜻밖의 좋은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다. 개척자 회원이었던 조 가벳이 1919년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다시 돌아오자 그 해 10월에 프랭크는 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을 치유시킨 멜러리산의 시토회 수도원으로 그를 데려가게 된 것이다. 멜러리 수도원은 더블린 시에서 1백 킬로미터쯤 떨어진 산 위의 봉쇄 수도원이었지만 방문객들에게도 수도자들의 기도생활에 참여할 기회를 주었다. 프랭크는 시토회 창설자 성 베르나르도를 공경해 왔었다. 그래서 레지오 교본에서는 이 성인의 말씀을 여러 군데 인용하고 있다.

수도원의 방문객 접대 수사가 프랭크에게 며칠 묶는 동안 영성 서적을 읽겠냐고 물었다. 그에게 전기 충격 같은 말로 들려 성모님에 관한 책을 청하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요셉 드 콘칠리오(Joseph de Concilio) 신부가 저술한 「마리아의 이해 The Knowledge of Mary)」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큰 감명을 받았고 자기에게 부족했던 마리아께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책은 3백 쪽이나 되는 분량으로서 이미 절판되어 있었고 수도원 밖으로 빌려갈 수 없었기 때문에 며칠 동안 계속 베꼈다. 그러는 가운데 그 내용이 자기에게 말씀하고자 했던 것을 훨씬 더 생생하게 깨닫게 되었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즉시 그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것이 내가 찾던 것임을 알고 굉장히 흥분했다. 그것은 몽포르의 책에서 놓친 토대였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학이 여기 있었다. 나는 완전히 압도되었다. 나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프랭크는 그 수도원에서 며칠 머무는 동안 수도자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거룩하게 보였고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로 가까이 간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들의 관상생활을 탄복하고 부러워 했지만 결코 그것이 자신의 성소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 성직이나 수도생활이 아니고 그렇다고 결혼생활에 있는 것도 아님을 깊이 인식했다. 그의 소명은 다른 방식의 선교생활이었다. 그는 자신의 선교 소명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지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하여간 선교가 자신의 소명임을 확신하였다.

조 가벳은 다시 술을 완전히 끊게 되었고 올바른 길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프랭크는 그 때부터 매년 여름 멜러리 수도원을 방문하였다.

1917년은 매우 뜻깊은 해였다. 그 해에 파티마의 성모 발현과 러시아의 공산 혁명이 있었으며 꼰뚜베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원인 막시밀리안 콜베(Maximilian Maria Kolbe)에 의해 ‘성모의 기사회’가 조직되었고 레지오 마리애의 예비 모임이 시작되었다.

그 해에 빈첸시오 회원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두개의 협의회로 나누었다, 새 협의회의 명칭은 빠뜨리치안회로서 프랭크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새로운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즉, 영적으로 방치된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절대 금주 개척자 회원들을 모집하였으며 매일 미사 참례와 가정에서의 예수 성심 공경을 권면하고 갈색 성의를 착용하도록 권장했다.

그 사업들 중 몇 가지는 여성들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처음으로 여성들이 빈첸시오회 회원으로 받아들여 졌다. 지원자들 중에는 이미 조반 센터 사도직 경험이 있는 여성들도 있었다. 다양한 활동을 조정하고 감독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 관리기관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프랭크는 나이 많은 뉴질랜드 출신 엘리사벳 커완(Elizabeth Kirwan)으로 하여금 월례회의를 주재하고 운영하도록 하였다.


관리기관 월례회의에서 교리나 신앙생활의 제반 의문점이나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는데, 특히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신심」 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프랭크가 그 책의 내용을 설명해 주면서 읽어볼 것을 강조하였으나 회원들은 관심을 가지기는 했지만 잘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그 책과 몽포르 루도비코의 가르침에 대해 토론을 하기 위해 별도의 특별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이 특별 모임은 1921년 8월까지 계속되었다.

레지오 마리애의 첫 회합은 1921년 성모 성탄 축일 전야인 9월 7일 더블린의 빈첸시오회 회관인 마이러 하우스에서 개최되었다.

레지오가 출범한 경위는 어느 주일에 빈첸시오회 회원인 매트 머레이(Matt Murray)가 관리기관 모임에서 병원의 부인 병동 방문에 대한 활동 보고를 하였다. 그의 보고는 모든 참석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 당시 병원 사도직은 남자 회원들이 맡고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다과 시간 동안 몇몇 여성들이 부인 병동 방문은 여자들이 담당할 것을 제안하자 만장일치로 통과 되었다. 그래서 여성 회원들만 별도로 모집하여 그 다음 수요일 저녁에 다시 모이기로 하였다. 그날 저녁이 성모 성탄축일 전야라는 사실은 아무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1921년 9월 7일 수요일 저녁 8시에 15명이 모여 첫 회합을 가졌다. 그들은 영적 지도자 토허(Toher) 신부와 프랭크 더프 및 13명의 여성들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20대의 젊은 층이었다. 그런데 방에 들어 섰을 때 프랭크는 흰 보가 깔려 있는 탁자 위에 조 가벳이 자기에게 남겨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상’이 놓여 있고 양쪽으로는 두 개의 꽃병과 불을 켠 두 개의 촛대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워 하면서도 기뻐했다. 처음에는 누가 그랬는지 몰랐으나 후에 수녀원에 입회한 앨리스 키오프(Alice Keogh)의 영감으로 꾸며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어느 레지오 회합에서나 그와 똑 같은 차림을 볼 수 있다.

프랭크는 그처럼 분위기가 잘 잡힌 조촐한 제대를 보고 단원들이 성모님을 초대한 것이 아니라 성모님이 자기들을 초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후에 그는 레지오가 초자연적이고 마리아적인 분위기 속에서 마리아의 정신으로 조촐하게 창설되었음을 상기하면서 “레지오는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생겨난 마리아의 정신이다”

레지오의 첫 회합에서 단원들이 맨 처음 함께 한 행동은 빈첸시오 회합 순서대로 무릎을 꿇고 성령께 대한 호도와 묵주기도를 바치는 일이었다. 그 다음으로 영적 독서를 한 후 새로 생겨난 이 모임의 진로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대화하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일을 모색하였다. 결의 사항으로 매주 회합을 갖기로 하고 프랭크 외에는 남성을 입단시키지 않으며 빈첸시오회의 고유활동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 영적인 활동만을 하기로 하였다. 토허 신부가 첫 훈화를 하였는데 그리스도의 신비체 교리에 대해 간단 명료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최초의 활동으로서 더블린 병원의 암병동을 두 사람씩 짝지어서 방문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레지오 마리애 회합의 원형이 되었다.

처음에 이 새로운 단체의 이름은 ‘자비의 모후회’라고 불렸는데 자비의 모후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구호 병원을 방문하는 것이 최초의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프랭크는 레지오 창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참된 신심’ 모임과 월례 모임을 통한 레지오 창설 사이의 연결이 그저 우연의 일치일 수는 없다. 너무나 초자연적인 섭리가 있었고 인간의 계획은 너무나 적었기 때문이다. ‘참된 신심’모임은 별 탈 없이 거의 4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리스도교적 조직 안에서 성모님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파악한 다음에야 비로소 레지오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레지오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 세계 각국으로 가지가 뻗어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블린 교구청에서는 공식 인가를 해주지 않고 계속 거리를 둥 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 당시엔 평신도 사도직 활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은 평신도 사도직 조직인 레지오 마리애를 탐탁치 않게 여기지 않았다.

프랭크가 레지오에서 남성들의 역할이 크게 대두됨을 절감하고 남성 쁘레시디움을 조직하여 하자 교구청의 인가는 고사하고 오히려 교구청 사제들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평신도인 주제에 사제의 임무를 대신하려는 사람이며 반 교권주의자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이에 대한 여파로 예수회 장상들도 같은 회 소속 사제들에게 레지오의 영적 지도에서 손을 떼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어느 저명한 성령 수도회 신부가 다음과 같은 해명을 하였다. “프랭크 더프는 사제와 평신도 사이의 차이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결코 성직자의 위신이나 권위를 깍아 내리는 일은 하지 않았고 오히려 늘 사제를 존경해 왔다. 다만 그와 교권자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고 오해가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상의 문제였다. 그 당시는 성직자들이 평신도 사도직 활동을 불쾌하게 여기는 시대였다. 우리는 프랭크가 그러한 시대상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익을 담당한 인물임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프랭크는 시대적으로 앞선 진취적인 인물이었다. 하여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첫 여성 쁘레시디움이 창단된 지 무려 8년이 지난 1929년 12월에야 비로소 ‘샛별 숙박소’ 봉사자들로 구성된 첫 남성 쁘레시디움이 창단되었다.

초창기부터 레지오의 몇 가지 규칙을 정하면서 한 가지 원칙을 세웠다. 그것은 각 여성 쁘레시디움마다 경험 많고 유능한 남성 단원 한명을 두어 업무를 수행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남성 단원을 트리뷴(tribune)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후에 남성 쁘레시디움이 생기게 되자 트리뷴의 의미도 달라지게 되었다. 프랭크는 달라진 의미를 다움과 같이 설명하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영적 지도신부 대신의 자격으로 쁘레시디움에서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다시 말해 한 사제가 많은 쁘레시디움을 맡고 있어 도저히 혼자서는 영적 지도를 하기가 벅찰 때 그 사제의 임명에 의해 ‘영적 지도자 대리’ 역할을 하는 사람을 트리뷴이라 한다.”(Charles T Moss, Frank Duff : a living autobiography’ . Maria Legionis. Dublin 1983. 2)

다른 대륙에 첫발을 내디딘 남성 쁘레시디움은 1931년 11월 27일 미국의 뉴멕시코 주 라톤의 성 패트릭성당에서 광부들로 구성된 쁘레시디움이었다. 캐나다와 중국에서도 남성들이 첫 쁘레시디움을 이루었고 아프리카 대륙의 첫 쁘레시디움도 칼라바르(Calabar) 해안의 흑인들로 구성된 남성 쁘레시디움이었다.

4)교황 비오 11세 알현(1931년)

프랭크는 레지오로 인해 사방에서 어려움이 밀어닥치자 교황청과 접촉하여 해결해 보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마침 1930년도에 로마 교구 총대리 추기경이 레지오를 알게 되어 그 창설자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프랭크는 주님의 섭리와 안배로 받아 들였다.

프랭크는 영국 리버플 교구 주교와 함께 교황청을 방문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 당시 ‘가톨릭 운동(Catholic Action)’ 의 교황으로 알려져 있었고 교회의 선교사업에 있어서 평신도들의 역할과 책임이 인정 되어야 한다고 호소해 왔다.
교황은 레제오에 대해 질문을 하시다가 “내가 당신들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랍니까?” 하고 물으셨다. 이 말씀은 프랭크가 매우 고대하던 질문이었기에 “성하께서 레지오가 전세계로 확장되기를 바라신다고 저희가 말할 수 있다면 레지오 보급의 효과적인 선전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온 마음으로 그것을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프랭크는 그 순간에 레지오가 안전하게 구제받은 것을 알았다. 때는 1931년이었다(Cf, R. Bradshaw, op, cit,. 101-102)

2년 후인 1933년 9월에 프랭크가 교황으로부터 레지오를 축복하는 한 통의 서한을 받음으로써 레지오는 처음으로 문서를 통해 인정받게 되었다. 그 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아름답고 거룩한 사업을 펴고 있는 레지오 마리애에 특별한 축복을 보냅니다. ‘마리아의 군단’이라는 그 이름이 바로 모든 것을 말해 주며, 단기에 새겨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모습이 높고 거룩한 일들을 수행하는 레지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착수한 그 ‘기도와 활동의 사도직’을 더욱 성실히 수행하도록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 사도직 활동을 성실히 수행할 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도 또한 구원의 협력자로 삼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구세주께 감사를 드리는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교본 부록1, 498쪽)

4. 레지오의 전성기(1931-1971)

1)레지오의 급속한 성장 · 발전

1932년 더블린에서 개최된 세계성체 대회에 세계 각처의 성직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 곳에 체류하는 동안 레지오에 대해 알게 되었고 고국으로 돌아가 교구와 본당에 쁘레시디움을 설립, 주회를 시작함으로써 레지오가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프랭크는 레지오가 모든 대륙으로 뻗어 나갔을 때도 여전히 시청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 두 가지 큰 일을 동시에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1933년 1월 그의 나이 44세에 공무원직을 그만 두고 레지오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1934년에는 미국에 레지오의 첫 특파원이 파견되었고 1936년에는 에델 퀸이 아프리카에 파견되어 레지오를 급속도로 보급 · 성장시켜 나갔다.

2)교회 일치 운동가

교회 일치 운동에 있어서 프랭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기 20년 전에 이미 더블린에서 ‘메르시에 협회(Mercier Society)’와 ‘불기둥 협회(Pillar of Fire Society)’를 창설하여 앞장 서 기도했다. 메르시에 협회는 1941년에 벨기에의 교회 일치 운동가인 메르시에 추기경(Desire J. Mercier, 1851-1926)을 기념하여 창설되었는데 참된 신앙에 대해 비가톨릭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임이었다.
그리고 불기둥 협회는 유다교를 신봉하는 유다인들과의 대화 모임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교회 당국으로부터 금지당해 두 협회가 동시에 문을 닫게 되었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 이후에야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3)가족의 죽음과 프랭크의 애국심

프랭크는 아버지가 1918년에 56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자 장남으로서 가족을 부양하였다. 그의 뒤에는 늘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신중하고 포용력이 있었으며 다정다감하였다.프랭크와 그의 모친 간의 유대 관계는 각별하였다. 그녀는 프랭크가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애썼고 잦은 이사에도 불구하고 언짢은 기색조차 하지 않았다.

프랭크는 동생들도 각별히 사랑하였다. 그런데 평화로운 가정이 별안간 줄초상을 치뤄야 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1949년에 그의 여동생과 남동생이 죽고, 이듬해에 어머니가 별세했으며, 그 다음해에는 막내 여동생마저 죽었다. 남은 가족이라곤 의사인 여동생 한 병 밖에 없었다.

프랭크는 악몽 같은 슬픔을 떨쳐 버리기 위해 1951년부터 동료단원들과 함께 자전거 여행을 시작하였다. 시골길을 느긋하게 달리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즐기기에는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름다운 경치를 더 오래도록 즐기기 위해 사진 촬영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프랭크는 참된 애국자였다. 그의 애국심은 두가지 사랑, 즉 종교에 대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다. 그는 나라에 사랑만으로는 완전한 애국자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애국심은 어디까지나 올바른 이성에 바탕을 둔 사랑이어야 하고 종교에 속해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다시 말해 애국심에는 반드시 신앙심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후에 「나라에 대한 참된 충성심」(Cf. F. Duff, Thru devotion to the nation, Dundalgan Press, 1971, 40-42;「애국심과 신앙심」, 조비오 신부 역, 성요셉출판사 1990, 78-83쪽)이란 소책자를 저술하면서 앞에서 말한 그의 사상을 피력했다.

4)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참관자(1965년)

프랭크는 그의 일생에 있어서 비록 여러가지 큰 어려움과 시련을 겪고 미움을 사기도 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명예스러운 순간도 적지 않았다. 몽포르 수도회와 성령 수도회에선 그를 명예회원으로 임명함으로써 그는 이 수도회들의 모든 선익에 한몫을 차지하였다. 특히 몽프르 수도회에선 그에게 마리아 명예 작위를 수여하기까지 했다.

1956년 12월 미국의 오하이오 데이톤 대학교에서는 성모학 분야에 있어서 그의 탁월한 업적의 대가로 마리아니스트상을 수여한다고 시상식장의 초청장을 보냈다. 프랭크는 미국에 와서 잠시 뉴욕에 체류하는 동안 수많은 레지오 단원들이 모인 가운데 자리를 함께 하였다. 뉴욕 세나투스 영적 지도신부가 프랭크를 ‘마리아의 확대자(Magnifier of Mary)’라고 소개하였다.

1961년 요한 23세 교황은 그에게 성 그레고리오 수도회 기사 훈장을 수여했고 1968년에는 더블린 국립대학교에서 그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명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1965년 9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마지막 회기에 평신도 참관인으로 초청된 것이었다. 공의회 초기에는 다른 몇몇 평신도들이 초청된 반면, 그는 초청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공의회에서 교부들이 토론하고 장려하는 의제들 중의 상당 부분이 프랭크가 주장했던 것들이고 실제로 레지오 제도에 흡수 되었으며 레지오 교본에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회기 중 적당한 시간에 공의회 교부들이 모두 성 베드로 대성전에 모여있는 자리에서 프랭크에게 감격스런 상이 주어졌다. 사회자인 런던의 히난 추기경이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가 그 자리에 참석해 있다고 알렸더니 2천5백 명이나 되는 공의회 교부들이 그에게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를 한참 동안 보내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전세계 포교지역에서 이미 레지오가 선교를 상징하는 단체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찬사와 갈채를 표현했던 것이다.

로마에 3개월간 체류하면서 프랭크는 주로 주교들을 대상으로 32회에 걸쳐 공식 연설을 했다. 그리고 레지오의 아프리카 선교사 에델 퀸의 시복 절차에 대한 모임에도 참석하였다.

프랭크의 로마 체류에서 정정을 이룬 것은 교황 바오로 6세의 초대로 개인 알현을 하는 순간이었다. 교황은 그를 포옹하면서 교회에 대한 크나 큰 봉사에 대해 깊은 사의를 표하고자 오래 전부터 만나고싶었다고 하였다. 교황은 후에 레지오 마리애 창설은 중세기 대수도회들 창설 이후로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 중의 하나였다고 천명하였다.(Cf. Hilde Firtel, op. Cit., 106-107)

5. 프랭크 더프의 생애 말기(1971-1980)

1)레지오 창설 50주년 기념식

1971년 9월 7일 주일은 레지오 창설 50주년 이 되는 날로서 더블린에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더블린 교구장은 연설에서 레지오를 높이 치하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교황청에서도 축하 서한을 보냈다.

이날을 맞아 프랭크가 세계 각처에서 받은 수많은 축하 서신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을 준 것은 초창기에 고통을 안겨준 조국 아일랜드의 주교단으로부터 받은 편지였다. “레지오 마리애는 베들레햄과 나자렛에서 우리 구세주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겪은 고초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어둠과 가난과 질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창설 단원들의 초자연적 신앙과 동기는 세속의 온갖 변천 속에서도 무사히 살아 남았을 뿐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확장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레지오는 다양한 기후나 민족이나 문화 상황에서도 기도와 활동의 규율을 지켜왔습니다. 우리는 귀하께서 수천 명의 주교들로부터 인가를 받고 교황 성하로부터 재가를 받은 기본 헌장을 확고부동하게 보존해 온 데 대해 찬사를 보냅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초 자연적 불변성은 하느님의 권능과 성령의 영감과 성모님의 보호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습니다.(R. Bradshaw, op. Cit., 224-225)

2)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알현(1979년)

프랭크는 비오11세 교황으로부터 시작하여 교황이 바뀔 때마다 개인 알현의 특전을 입었다. 그러나 등극한지 33일 만에 서거한 요한 바오로 1세만은 예외였다.

1979년 5월 프랭크는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했다. 이분은 이미 폴란드의 크라코프 대주교로서 한 그룹의 아일랜드 순교단을 접견했을 때부터 레지오를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자신의 이상과 똑같은 레지오의 성모님께 대한 영성은 교황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프랭크는 콘칠리움 간부들과 함께 교황 개인 경당에서 새벽 미사에 참례한 후 교황의 아침 식사에 초대받았다. 식사동안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대화가 있었다. 레지오의 세계적인 번창과 많은 지역에서 당면하고 있는 애로사항에 대해 대화를 하던 중 교황 성하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들려 주셨다. “여러분에게 메시지를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혼드 추기경의 임종 때 한 젊은 사제(요한 바오로 2세 자신)가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폴란드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들도 큰 어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추기경은 마치 마지막 유언이라도 하듯이 ‘마리아를 통하여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를 통한 승리’가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나의 메시지입니다.”(「프랭크 더프의 생애」 307-308쪽 참조) 작별 인사를 할 때 또다시 교황 성하는 ‘마리아를 통한 승리’를 강조함으로써 모든 레지오 단원들이 명심해야 할 좌우명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3)프랭크의 덕성(德性)

프랭크는 뛰어난 유머 감각과 재치의 소유자로 즐거운 농담으로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 줄도 알았다. 설득력도 대단하여 그가 사도직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늘 청취자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했고 아이들도 그를 좋아하며 따랐다. 그가 집에서 레지오 사무실로 건너갈 때면 천상의 모후 숙박소에 살고 있는 미혼모들의 아이들이 그를 둘러싸 손을 잡기도 하고 팔에 매달리기도 하였다. 가끔 그는 동심으로 돌아가 그들과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그가 지닌 여러 덕성은 성모마리아의 덕성이었다. 그는 교본에 마리아의 정신과 덕목을 삽입하였다.(교본 제3장, 28쪽)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그의 덕성은 특히 겸손과 절제였다. 그는 레지오의 놀라운 발전이나 업적을 자신의 공로로 돌린 적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그를 레지오 창설자라고 부르는 것까지도 좋아하지 않았다.

귀에넨스 추기경은 프랭크의 겸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더블린에서 개최된 레지오 창설 50주년 기념식중 내빈 석상에 프랭크가 보이지 않자 그를 찾느라고 두리번 거리다가 군중 속에 끼어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만큼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하느님의 권능과 은총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도구가 되길 바랄 뿐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J. Suenens, ‘Frank Duff’, in La voce della Legione, 6(1981), 9)

프랭크는 또한 청빈의 덕과 단순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레지오 세계 총본부를 방문해 보면 누구나 건물과 사무실이 허름하고 초라한 데 대해 놀란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도 대단했다. 그는 불굴의 의지를 지녔고 옳다고 판단한 일에는완고할 정도로 고집이 세었으며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저서를 남길 정도로 완덕에로의 노력은 영웅적이었다. 어느날 한 친구가 그에게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Rembrandt)의 ‘기사(騎士)’ 그림을 보여주자 그는 자기도 ‘전사(戰士)’라고 말하였다.

4)후세들을 위한 TV 녹화 촬영

1979년 8월 미국 필라델피아 세나투스 영적 지도자 몬시뇰 찰스 모스(Charles Moss)와 간부들이 프랭크를 비디오 녹화 시리즈로 담아 놓고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더블린에 왔다. 이미 그이 나이 90세인데다 레지오의 장래를 위해 너무 늦기 전에 녹화를 해두어야 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TV 비디오 녹화는 성공적이었다. 프랭크는 여덟 번의 회견과 열 네 번의 강연을 해주었다. 그와 가까이지내는 협조자들도 기꺼이 회견에 응해 주었다. 수년 내에 그의 영적 자녀들은 먼 훗날에도 레지오의 창설자를 화면을 통해 만나 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의 덕성을 본받고 그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5)프랭크 더프의 죽음과 영결

프랭크는 1980년 11월 7일 91세의 나이로 더블린의 자택에서 선종했다. 그날은 첫 금요일로서 예수 성심께 대한 그의 크나 큰 신심을 드러내는 날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레지오 특파원으로 지냈던 그의 영적 딸의 장례 미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임종한 날에도 두 대의 미사에 참례했다.

미사 참례를 하고 돌아오자 식복사에게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점심식사도 하지 않을 것이며 의사도 부르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2층에 올라갔다. 오후 네 시경 식복사가 따끈한 차를 가지고 올라 갔을 때 프랭크는 이미 임종한 후였다. 그녀는 그 순간을 다은과 같이 진술했다. “내가 문을 열었을 때 난 그분이 이미 숨을 거둔 것을 알았어요. 그분은 가슴에 팔을 포갠 상태였어요. 그분은 임종 때 예수 성심상을 보고 있었을 거예요. 그 그림은 바로 그분 맞은편에 있었으니까요. 난 그분의 눈을 감겨드리고 도움을 청하러 달려 내려왔어요.”(「프랭크 더프의 생애」 314쪽)

순식간에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퍼져나갔다. 이미 그는 생존시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산 성인으로 여겨져 존경받았다. 장례는 7일장으로 지냈다. 장례 미사는 성 안드레아 성당에서 추기경 1명과 3명의 대주교, 35명의 신부들이 공동으로 집전하였고 조문단석에는 10명의 주교, 1백명 이상의 신부, 아일랜드 대통령과 수상, 더블린 시장 등 정치가 및 외교 사절들이 있었다. 1천5백 명 수용 능력의 성당에 4천여 명이 몰려들어 많은 사람이 바깥 거리에 서 있어야 했다.

미사 주례 추기경은 강론에서 “프랭크가 1976년도에 ‘그 해의 아일랜드인’ 수상자로 선정되었듯이 아마 앞으로 교회가 그를 ’20세기의 아일랜드인’으로 선언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하였다. 미사 후 가족묘지가 있는 글라스네빈(Glasnevin) 공동 묘지까지 행렬하였는데 장례 행렬이라기 보다는 축제 행렬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프랭크가 별세한 바로 다음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의 전보를 보냈다. “전세계 레지오 마리애가 그 창설자 프랭크 더프씨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나는 단원들과 함께 그의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는 단원들과 함께 그의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가 창설한 이 단체는 수많은 평신도들에게 복음화와 성화의 필수적인 임무를 알게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열렬히, 효과적으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모든 레지오 단원들에게 교황의 강복을 보내며 그를 잃고 마음 아파하는 단원들에게 위로와 앞으로의 사업에 격려를 보냅니다.”(「프랭크 더프의 생애」323쪽)

※ 이상 기술한 「프랭크 더프의 생애」는 레지오 마리애 영성(성요셉출판사, 최경용 신부 지음)에 나와 있는 내용을 발췌하여 인터넷에 올려져 있던 것을 옮긴 것입니다. 프랭크 더프에 대해 더 자세히 아시고자 하시는 분은 「프랭크 더프의 생애」(성요셉출판사, 안상인 지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내용은 레지오의 창설자이신 프랭크 더프에 대해 단원들의 이해를 돕고자 레지오 단원이 알아야 할 최소한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며 어떤 상업적인 목적으로의 이용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