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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현양회 일본 오타줄리아 축제순례안내
세나뚜스 조회수:590 112.166.26.76
2016-01-22 13:42:18
순교자 현양회 일본성지순례

① 김길수교수 와 함께하는 오타줄리아축제 순례
  때 : 6월8일-6월11일(3박4일) 인천공항출
  곳 : 동경(동경주교좌성당) . 코우즈시마(오타줄리아축제)
       순례미사 최창화 몬시뇰
  회비:162만오천원 (선착순 45명)

② 김길수교수와 함께하는 나가사키 일본성지순례
  때 : 2/7일 2/17일 3/7일. 4/13일 4/23일.5/9일
  곳 : 나가사키(하비에르성당,우라카미성당,운젠성당)
  회비: 56만9천원(4박5일,선착순45명) 부산국제여객터미널출
  
  문의 ; 02)318-7202 . 778-5100

절해고도에 피어난 신앙의 꽃

1517년 루터의 <95개조의 논제>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의 물결은 기존 로마교회의 체제를 송두리째 흔들고 구체제에 대한 도전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로 인하여 로마교회 내에서도 새로운 신앙체계를 세울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탈리아 예수회를 중심으로 젊은 선교사들이 유럽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의 전교 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는 선교목적으로 1582년 마카오에 입항하고 1601년에는 베이징(북경)에 들어가 정주허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는 최초로 그리스도 교리를 중국에 소개한 책으로서 오늘날 신을 천주라고 부르게 된 원전이 되었다.

당시 조선은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들을 통해 서양문물을 접하게 되는데 이 책 역시 바로 수입이 되어 18세기 중엽에는 한글 고사본(古寫本)이 많이 나왔을 정도로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조선은 세계 기독교 전교사에 유래가 없는 유일한 자생 교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바오로의 전교여행으로 시작된 기독교의 전파는 모두 선교목적을 지닌 선교사가 새로운 지역에 들어가 전파하게 되는 데 유독 조선만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정보와 성서를 통해서 자생적으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오직 믿음을 통해 시작되었다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北京(북경)]에 들어가 예수회 선교사에게 교리를 배운 뒤 영세를 받은 이승훈이 최초의 기독교인으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일본의 경우에는 해양으로의 진출이 활발했던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인들에 의해 일찍부터 그리스도교와 접촉하게 된다. 1549년 프란치스코 사비에르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었고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파가 되어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는 고위층에까지 기독교인이 생기게 되었다.

임진왜란의 주장으로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와 함께 내침해 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는 잘 알려진 대로 당시 그리스도교인이었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풍신수길)]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침략군의 선봉에 서기는 하였으나 종교적인 연유로 가능한 한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노력하였다.

예수를 믿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교인의 입장에서도 그 모두를 실천에 옮기기는 항상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믿음을 삶 속에서 올곧게 실천하고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살아간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성인이라 부르고 그녀를 성녀라고 부르는 데 주저할 수 없다.

서울 양화진 절두산 성당 앞마당에 가면 조그마한 가묘가 외롭게 자리 잡고 있다. 1972년 일본 고즈시마에 있는 그녀의 묘토(墓土)를 한 줌 떠다가 오다아(吳多雅)란 작명으로 봉안한 것이다.

이 묘의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임진년 다음 해인 1593년 히데요시의 특별명령으로 일차 진주성 싸움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2차 진주성 싸움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싸움은 외부의 지원 없이 오직 진주성에 웅거한 군민들과 내침해온 역전의 싸움꾼들인 일본군과의 대전으로서 약 일 주 만에 성은 함락되고 성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도륙되고 말았다. 이때 피로 물든 남강 가에서 은장도로 자결한 한 젊은 여인 옆에 어린 소녀아이가 지나가던 도공의 손에 발견되어 양녀가 되었다.

이후 이 아이는 도자기를 굽던 많은 조선의 도공들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고 대마도에서 대마도 도주인 요시도시의 아내인 고니시 부인(소서행장의 딸)의 양녀가 되어 가톨릭 교리를 배우고 줄리아란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덕천가강)]가 정권을 잡자 이에 대항하여 싸우던 고니시는 처형당하고 그녀는 도쿠가와의 시녀(侍女)로 들어갔다.

도쿠가와는 그녀가 가톨릭에 심취해 있음을 알고 개종을 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여 1612년 이즈오시마[伊豆大島(이두대도)]에 유배된 뒤, 다시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절해고도인 고즈시마[神津島(신진도)]로 옮겨 그곳에서 라틴어로 된 성경을 보며 기도와 찬미로 일생을 마쳤다(1651년).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면 원래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겠다는 회유를 끝끝내 거절하고 목숨을 걸어 신앙을 지키기 위해 평생 동정으로 결코 하느님을 거역하지 않고 자기 생을 살아간 성녀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조선 양가집 소녀로서 최초의 영세자로 기록된 이승훈보다도 약 180년을 앞서 영세를 받았고, 최초로 중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마테오 리치보다도 앞서서 천주를 마음속에 모시고 평생을 맑고 깨끗한 순명의 삶을 살아간 성녀였다.

진주는 도도히 흐르는 남강과 함께 임진란의 흉흉한 전란 속에서 두 송이 꽃을 피워냈으니 그 하나는 논개요, 또 다른 하나는 오다 줄리아이니 한 사람은 조국 남강에서 몸을 던져 수련처럼 피어났고 다른 한 사람은 적국 일본, 절해고도에서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동백처럼 피어났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믿는 한국인이라면 그 옛날 목숨까지 바쳐가며 조국을 그리며 홀로 신앙을 지킨 오다 줄리아의 생애를 한번쯤 생각해보고 자긍심과 함께 조금이나마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성녀 줄리아> (원제 三彩의 여인) 모리 노리꼬(森 禮子)지음 김갑수 옮김 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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